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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스락 Oct 19. 2024

나는 소녀가장이 아닙니다.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그리웠어요.

운동회가 한창이다. 우리 팀 주전이 자꾸 밀리고 있다. 아, 이럴 땐 응원을 해야 한다. 온 힘을 다해 뛰고 있는 선수에게 응원을 퍼부어 줘야 한다. 간격이 더 벌어지면 따라잡을 수 없다. 운동회의 꽃 이어달리기에서 우리 팀이 지고 있는 상황.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쪼그라들면서 온몸이 긴장되어 세포가 밖으로 튀어나올 판이다. 뛰는 사람보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내가 더 긴장하고 있다. 큰 점수가 걸려 있기에 꼭 이겨야 한다.


"달려, 더 달리라고, 지치면 안 돼" "더 빨리 달려" "응원해" "얼른 응원하라고" 목이 터지라고 허공에 소리를 쏘아댄다. 내 목소리가 내 귀청을 뚫고 나가더니 메아리가 되어 쩌렁쩌렁하게 귀가를 맴돈다. 


그렇게 목이 터지라 응원하고 있는데 "어머 무슨 여자애가 목에 핏대까지 새워가며 소리를 질러"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랑곳하지 않고 더 달리라고 손짓 몸짓 다 하며 응원했다.


"달려, 달리라고 그러다 따라 잡혀, 뛰어, 뛰어, 뛰라고~"


"얘, 소리 좀 그만 질러라" "아이고 목도 안 아프다니" "귀청 떨어지겠네" 꽃밭에 잡초를 낚아채듯 내 팔을 잡아채며, 시끄럽다고 조용히 좀 하란다. 순간 주위에 시선이 나에게 몰린다. 우렁찬 목소리를 뽑아내던 분화구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덜 익은 조가비처럼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가을 운동회 준비로 학교는 하루하루가 행사 날이다. 학년별로 운동회 연습 하느라 운동장은 바쁘다. 부채춤, 곤봉, 태권도 시범 학년별 장기 자랑 연습으로 분주하다. 5학년 우리 반은 이어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다. 나는 체육부장이었고, 조별 선수를 체크하고 연습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작은 키에 삐쩍 마른 여자아이가 깡다구만 있었던 터라 뭘 시켜도 잘한다며 선생님은 체육대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다.


운동회 당일 날까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모든 게임일정과 선수들을 챙겼는데 믿고 있던 마지막이어달리에 출전한 달리기가 빨랐던 친구가 추월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이성을 잃고 말 그대로 빽빽 소리 지르며 광분한 상태로 천방지축 날뛰고 있었다.


"누구네 딸이야." "쪼그만 가스나가 보통이 아니네, 저 눈 좀 봐 워매 무서워라" 

아주머니들의 속닥거림이 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순간 창피함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학부모님들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행동, 말투가 다 관심 대상이었고, 아무도 없는 연극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우리 반은 우승했고 선생님 칭찬이 이어졌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조개껍질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온몸을 따갑게 찌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삼삼오오 모여 싸 온 음식을 나눠 먹는 분위기다. 친구 손에 이끌려 친구 가족과 몇몇 학부모님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머 너 아까 그 친구 맞지? 막 응원하라고 소리 지르던"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딸 얼른 앉아 이거 먹어, 너는 부모님 안 오셨니?" "엄마 나랑 같이 먹으면 안 돼?"

친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부모님께 가겠다고 친구 손을 놓았다.


"뭔 소리냐, 아까는 부모님 안 오셨다며" "그러지 말고 일루 와 같이 먹어, 울 엄마 김밥 겁나 맛있다니까"

친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는,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걸까? 나는 소녀가장도 아니고 언니도 오빠도 있는데 왜 나는 항상 혼자인 걸까?


그해 가을 운동회는 앙칼진 여자아이가 땀 냄새 나는 교실에 웅크리고 앉아 까만 눈물로 배를 채운 날이다.

혼자서도 잘할 줄 알았는데 엄마 도시락을 먹고 싶었고, 엄마 응원이 듣고 싶었고,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에 목말라 있었다. 아버지는 운동회 끝나고 받아온 상장을 보고 막내가 뜀박질도 잘한다고 흐뭇해하시며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는 마음에 꽈리를 튼 슬픔에 묻혔다.



헐렁한 파자마 바지를 걸쳐 입고 옆에 누워 있는 앳된 소년, 솜털이 뽀송한 아들. 습한 교실에서 까만 눈물을 삼켰던 앙칼진 여자아이가 지금 내 옆에서 뽀스락거리는 아들과 같은 나이였다. 왜 엄마는 아버지는 그토록 슬프게 나를 내버려뒀을까?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찌 외면했을까? 왜 가난은 그토록 힘든 슬픔이었을까? 가슴을 파고드는 아들의 살냄새가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그때 그 소녀는 왜 사랑받지 못했을까,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녀에게 오늘은 아이처럼 슬퍼해도 된다고 그 시간을 잘 지나왔다고 다독여 주고 싶다.




아기도 아니고 소년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보호의 품은 깨어졌으나, 홀로 걸어갈 내 안의 무언가는 깨어나지 못한 나이, 문득문득 한낮의 어둠이 찾아오고 한밤의 몽유가 걸어오고, 자주 세상의 소리가 끊어졌고 이 지상에
나 혼자인 듯 아득해지곤 했다.

눈물꽃 소년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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