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배드민턴 경기 출전을 한다는 남편.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말은 집에서 쉬고 싶었다. 남편이 주말에 못 온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 반, 안도의 마음 반, 혼자만의 시간이 차고 넘치겠다는 기대감으로 뭘 할지 잠시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만날 사람을 생각해도 백지 위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다. 십여 년을 남편이 친구이자 동료이자 유일한 벗이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환하게 웃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은 타지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처럼 완벽하게 흡수된 사람. 남편이 흡수된 게 아니라 그곳이 남편에게 흡수되어 있었다.
남편이 자주 간다는 곱창집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아이들 맞춤으로 고소한 곱창을 잘도 굽는다. 너스레를 떨며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며 일상의 사소함을 나누는 모습이 꽤 친근해 보인다.
우리의 주거지가 흡사 남편이 있는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곳은 정체되어 있는데 남편이 있는 곳은 무지개 가루가 뿌려진 듯 안정적이고 평화롭다. 기차를 타기 전까지 입을 꾹 담은 별님이가 웃는다. 핸드폰과 사랑에 빠진 아들은 아빠 얼굴을 보고 어깨동무하며 깔깔 특유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즐거워한다.
아이들 시선이 아닌 부모의 시선으로 잘못과 단점만 보면서 답답해했던 나에게 묻는다. '너 뭐가 불만이냐?' '아이들이 저렇게 웃고 있는데' 일주일 동안 엉켜 있던 아이들의 성난 감정은 어느새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다. 공기가 탁했던 건 내 시선에 갇혀 있던 아이들 모습이었다. 남편은 아이들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며 전혀 무겁지도 답답하지도 않게 대처한다.
농촌 체험으로 고무마를 캐러 갔다. 뭉개진 마음을 다림질하기 위해 무리한 스케줄을 감행했다. 볼멘 아들의 투정과 달가워하지 않은 남편. 아무렴 어때 고구마나 캐자는 심산으로, 당당하게 밭으로 향했다.
웬걸 소싯적 경험했던 농사일을 떠오르며 야무지게 덤볐지만 땅 깊숙이 들어가 앉아 있는 고구마는 흡사 토기 발굴 같았다. 어찌나 깊게 짱짱하게 박혀 있던지 파도 파도 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잘못 힘을 썼다간 허리가 동강 난 고구마를 만나게 된다.
후루르륵 찹찹 장성한 젊은 남정네들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낫으로 고구마 줄기를 단번에 절단내며 줄기를 칭칭 감아 한곳으로 옮기는가 하면 아쿠아맨이 사용했을 법한 금빛이 아닌 주황색 삼지창을 들고 와서 땅 깊숙이 박혀 있는 고구마들을 일망타진 줄줄이 사탕처럼 뽑아내고 있는 남정네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아빠는 왜 못 하는 게 없어" "아빠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
갑자기 질문을 퍼붓는 아들. 홍길동처럼 혼자 일을 다 하고 있는 남정네는 남편이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고구마 줄기로 머리띠를 만들어 쓸어 올리고는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 여기저기 아이들 틈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도 와서 해주세요" "선생님 삽을 이렇게 사용하면 되는 거예요" "아저씨, 호미는요"
"하하, 얘들아, 이것 봐 땅강아지야, 에구 두더지가 고구마를 다 먹었네"
"애들아 뱀이 있어. 이건 화사라고 해 화려해서 꽃뱀이라고도 하지" 고구마 체험하러 온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남편은 고구마밭을 제 집인 양 활보하고 다녔다.
"여보, 쉬어가면서 해 우리 체험 하러 온 거야, 몸살 나겠어."
"에이, 운동 되고 좋은데, 빨리 캐야 빨리 가지, 재밌잖아."
남편은 다들 쉬엄쉬엄 작은 체험을 즐기는 동안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남들이 설렁설렁 지나친 고구마밭을 삼지창으로 푹푹 파서 숨어 있던 고구마까지 몽땅 끄집어내는가 하면,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고구마 캐는 방법을 알려주며 일일 머슴을 자처했다.
어디서 무엇을 해도 튀는 남자, 어디서 무엇을 해도 튀지 않는 여자. 화성에서도 고구마를 심고 캘 남자.
그 남자와 살고 있는 나는 아직 화성 근처만 서성이고 있다.
대전에 남편 단골 미용실이 생겼고 단골 커피숍이 생겼고 단골 곱창집이 생겼고, 단골 고깃집이 생겼다. 남편은 단골집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파마를 시키고 커피를 마시고 곱창을 먹이며 확실한 영역표시를 했다.
PS
버거웠던 아이들 감정이 분산되어 살만한 하루였다. 부디 아이들이 크는 속도에 맞춰 부모로써의 나도 성장했으면 좋겠다. 남편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해서 단단한 건지, 행복한 건지, 탄탄한 건지.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단순화 시켜버리고 마는 화성 같은 남자. 온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의 성격이 무척이나 부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