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스티븐 핑커-
“극단적 환경이 주는 예도 있고, 유전이 미치는 극단적인 예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유전과 환경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보는 것이 옳은 설명이다.”
“빈 서판 이론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왜곡시켰다. 육아에 대한 많은 정책들은 부모의 행동과 아이의 행동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연구에 의존해 왔다. 이는 아이들이 훌륭하게 크지 못하면 그것이 부모의 잘못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 결론은 아이들이 빈 서판이라는 믿음에 의존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정 환경뿐 아니라 유전자도 제공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은 투자자이자 한 아이의 부모 관점에서 글을 썼다.
스티븐 핑커는 육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타고나는 본성과 기질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육아는 환경적 요인이 전부라는 빈 서판 학설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왜곡시켜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왜곡은 육아에 대한 정책이 부모의 행동과 아이의 행동 사이에서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연구에 의존하게 했다.
우리는 아이의 태도를 보고 무심코 편견을 가진다. 저 아이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나 보다. 저 아이는 사랑을 많이 바도 자랐네와 같이 말이다.
이것은 지나친 확증편향에서 오는 결과다. 우리가 가진 어떤 신념이나 지식은 그것이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했고,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따져보지 않고서도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런 확증편향은 인간의 행동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판단하게 만든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아이를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아이가 조금 경직 되어있고 행동이 조심스럽거나 어딘가 기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렇게 판단할 것인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아이는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매사에 밝고 애교가 많으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행동을 한다면 그렇게 판단하겠는가?
어떤 근거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참고해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길거리에서 떼를 쓰는 아이를 보고 우리는 무심코 부모가 아이를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빈 서판 이론이 낳은 가장 큰 부작용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이 모두 부모의 탓으로 돌려진다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정 환경뿐 아니라 유전자도 제공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최근 정신의학과 의사인 오은영 박사의 육아 솔루션 프로그램이 인기다. 금쪽이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인기가 굉장히 많다. 그만큼 여러 논란도 많다.
오은영 박사의 육아 프로그램을 직접 보고 느낀 나의 생각은 이렇다.
오은영 박사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다. 실제로 그녀는 많은 아이들을 치료했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녀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나 솔루션에는 문제가 없다. 그녀는 그동안 쌓인 많은 경험과 수학으로 진단을 내린다. 아이의 유전적 기질이나 육아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이 아니다. 바로 방송이라는 점이다. 방송은 수많은 시청자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볼 수 있는 매개체다. 오은영 박사의 육아 솔루션을 보는 시청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이들은 방송에서 보여지는 상황의 일부분만 보며, 이를 진단할 그 어떤 사전지식도 없다. 설사 사전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확한 근거나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편견에 의한 사전지식일 가능성이 높다.
시청자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아이의 유전적 기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이 시청자들에게는 아이의 잘못이 곧 부모의 잘못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
게다가 방송에 나오는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를 전체 육아로 일반화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사회가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는 잘못된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인편향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문제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문제는 내부적 요인이 문제라고 선뜻 판단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아이의 행동을 보고 부모가 잘못 가르쳤다고 오해할 수 있다.
아이의 잘못은 다차원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유전, 환경, 사회적 요인과 같은 많은 것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지만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중에 의해 과잉 일반화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시청자가 부모일 경우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 그들은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상황을 지켜보며 내가 더 나을 경우 비판을, 내가 더 부족하다고 느낄 경우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비교 편향 탓인데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 프로그램 말고 한때 연예인들의 육아 프로그램이 유행했을 때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시청자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을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에서 이런 다차원적인 시각을 제공해줘야 한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를 찰흙처럼 반죽해서 만들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시해야 한다.
빈 서판 이론의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 유전자 만능론도 문제지만 환경 만능론도 문제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여러 요인들이 모여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이분법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편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특히나 사람을 바라볼 때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대단히 다차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성격 유형도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으로 딱 구분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내향적인 성향이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외향적인 성향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소 차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하게 변하는 경우도 있고, 인내심 많고 느긋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투자만 하면 야수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 때문에 실제 상황과 사람들이 느끼는 상황이 다르게 보이는 괴리율이 생긴다고 말한다.
실제로 세상은 대단히 좋아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점점 더 살기 안 좋아지고 있다는 착각도 이분법적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투자자인 우리도 이런 이분법적 분류 탓에 손해를 본다. 우량주와 성장주, 가치주와 성장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편견에 빠질 수 있다. 우량주도 성장주가 될 수 있고, 가치주도 성장주가 될 수 있다.
기술주라고 해서 모두 성장주는 아니다. 기술주가 가치주가 되기도 한다. 기업을 바라볼때도 다차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인간의 편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투자에서 실패한다고 말한다.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편향은 심리학, 생물학, 신경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이 투자에 맞지 않게 진화됐다는 여러 학술적 증거가 있다.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본다면 자본주의는 고작 4분에 지나지 않는다. 23시간 56분을 생존을 위해 살아왔던 인류가 갑자기 자본주의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간의 경험에서 쌓이고 유전자에 각인된 편향을 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경경제학에서 밝히기를 인간이 투자에서 실패하는 많은 편향들이 뇌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손실회피편향은 대표적인 인간의 본성이고, 투자시장에서 다수가 실패하는 결정적 원인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이를 신경경제학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편도체는 두려움과 위협을 처리하는 감정적 센터인데 손실을 경험하거나 손실 가능성을 고려할 때 편도체가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전측 대상피질은 인간이 갈등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곳이다. 손실과 이익을 두고 인간이 갈등을 할 때 이익보다 손실에서 전측 대상피질이 더 활성화된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생존을 우선순위로 두기에 이익보다는 손실을 입지 않는 것에 더 우위를 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는 행동이 각인 되어있다. 실제로 그런 유전자가 더 오래 살아 남았을 것이다.
유전적으로 우리는 손실회피편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손실회피편향은 우리가 투자에서 실패하도록 유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손실회피편향을 극복하지 못할까? 그렇지 않다. 여러 환경적 요소를 바꿈으로써 우리는 손실회피편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다. 미국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는 나라다. 유럽 사람들이 이주해서 건설된 국가지만 유럽과 미국은 사상의 근본부터 다르다.
“부자들의 생활에 부러움과 질투어린 눈길을 던지는 미국인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또 비록 현재의 삶이 곤궁할지라도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 않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 부자가 되는 것은 이들의 최고 목표이며, 미국을 규정하는 요소이다."
-알렉시스 토크빌-
미국이라는 나라는 출신성분보다 재산규모에 따라서 신분을 나누는 독특한 신생 국가였다. 유럽이나 동아시아가 어떻게 태어났느냐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사회였다면 미국은 자본으로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귀족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나라였다.
그렇게 생긴 건국이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축보다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마치 더 잃을 게 없는 빈털터리처럼 자신을 코너로 몰아간다. 큰 도박을 즐기는 것처럼 돈을 쏟아 부으며 즐거워한다. 투기적인 영국인들은 파산을 두려워하고 프랑스인들은 파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비해, 백만장자 미국인들은 10배를 더 벌기 위해 투기판에 뛰어든다. 만약 빈털터리가 된다면 기꺼이 도박판의 점원이 된다. 천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미국인들의 특성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도박꾼들이 모인 나라로 만들고 있다."
-로버트 소벨-
미국은 저축보다 투자를 더 많이 하는 나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는 성향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가진 특별한 환경이 있는데 일명 개러지 벤처, 혹은 개러지 스타트업으로 불리는 차고에서 시작하는 사업이다. 미국 시가총액 1위와 2위의 기업인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두 차고에서 시작된 사업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미국에서 청년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쉽게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혹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정신과 사회적 기반 덕이다.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이념이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사회적 인프라가 주는 거대한 이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손실회피편향을 안고 태어나지만 환경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나는 행동경제학으로 투자를 배웠다. 인간의 수많은 편향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공부했다. 인간이 왜 이런 편향과 기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이를 투자에서 어떻게 이용할지 여부가 중요했다. 중요한 것은 신경학적, 유전적으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한다고 해서 이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가끔은 우직하게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이겨낸 것처럼 듣지 않고 몸을 묶는 것도 필요하다.
또 투자를 위해서 평소 생활태도도 고쳐야 한다. 무의식은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 무의식은 가장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 복싱선수들은 평소에 훈련을 통해서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든다. 투자자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훈련을 해야 폭락과 같은 리스크에서 자신과 자산을 지킬 수 있다.
투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전적 요소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환경적으로 이를 만들 수 있다. 유전과 환경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 모두 상호작용해서 나를 만든다. 훌륭한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편향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리고 외부적으로 어떤 요인이 나를 흔들고 방해하는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은 빈 서 판이 아니다. 우리는 절반이 채워진 서판을 가지고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서판을 어떻게 채우는지 여부다.
빈 서판
-스티븐 핑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