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침범하는 기억이 있다.
불현듯 침범하는 기억이 있다.
눈을 번쩍 떴다. 어두운 공기를 더듬어 손끝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나는 한 쪽 눈만 겨우 뜬 채로 액정을 바라본다. 새벽 4시. 아빠가 돌아온다던 그 시간이었다.
아빠는 낚시를 좋아했다. 베란다 한편에는 낚시 장비가 가득했다. 바닷물이 튀어 적당히 짠 냄새가 배어 있던 도구들. 작은 낚싯바늘을 넣어둔 플라스틱 통. 갯바위에서 잠을 자기 위한 캠핑 도구들까지. 베란다에서 아빠의 취미가 차지하는 공간은 꽤 넓었다. 아빠가 낚시를 다녀오면 낚시꾼들이 생선을 담는 쿨러에는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가득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생선을 손질하던 아빠. 아빠는 낚시 모자를 쓴 채로 양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족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잔칫날이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빠는 주방 한쪽에 앉아서 도마와 칼을 펼쳤다. 수건으로 빨간 피를 톡톡 닦아가며 회를 쳤다. 막 잡은 자연산 회를 먹는 가족들의 표정에 서서히 붉은 물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거실. 오늘따라 그 거실을 울리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피어오른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시간. 조용한 거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빠다. 지금 배에서 막 내렸어. 이제 집으로 갈게. 나는 아빠에게 일단 알겠다고 했다. 아빠의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는 잠결에도 대문 앞에서 익숙한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 꿈을 꾸는듯한 희미한 소리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빠가 오늘 잡은 생선을 확인하러 주방으로 따라 들어간다. 아빠의 입꼬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커다란 쿨러를 주방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슬쩍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얼마나 많이 잡아 오셨을까. 웃고 있는 아빠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궁금한 마음에 쿨러 가까이 바싹 다가갔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작은 고리 두 개를 차례로 열었다. 딸깍-딸깍-. 커다란 뚜껑 아래 무엇이 있을지 몰랐지만 나도 아빠처럼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쿨러 안에는 처음 보는 은빛 생선이 가득했다. 비늘에 반사되는 은색 빛에 눈이 부셨다. 그곳에는 은색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갈치였다.
아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갈치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갈치를 싱크대 안으로 와르르 쏟아놓고 물로 가볍게 샤워를 시켰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알던 갈치 빛깔이 아니었다. 몽롱한 상태로 봐서 그런 건가. 식탁에 올라오던 갈치구이는 분명 하얀색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갈치는 온통 은색 비늘이 빼곡하다. 아빠는 수세미로 은색 비늘을 살살 비벼 벗겨냈다. 나도 아빠 옆에 서서 같이 비늘을 다듬었다. 그러자 그 속에 하얀 속살이 보였다. 부드러운 갈치 살을 조심스럽게 손질해서 수건으로 살짝 눌러 물기를 뺐다. 마름모 모양으로 예쁘게 손질한 갈치회가 순식간에 접시 하나를 가득 채웠다. 반면 물고기가 달갑지 않은 엄마는 여전히 침대와 한 몸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갈치를 손질하면서도 연신 엄마를 불러냈다. 와서 갈치 좀 보라고. 정말 많이 잡았다고. 엄마는 귀찮은 표정으로 겨우 거실로 나왔다. 단잠이 깬 엄마의 마음도 모르면서 아빠는 갈치를 많이 잡았다고 자랑했다. 아빠는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자연산 회를 먹을 수 있지만 이런 시간이 피곤했을 거다. 나는 곁들일 음식들을 간단히 준비했다. 갈치회 한 접시를 두고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빠는 부드러운 갈치회 한 점을 조심스럽게 초장에 콕 찍어 엄마 입에 넣어준다. 엄마는 눈을 감고 억지로 갈치회를 우걱우걱 씹었다. 아빠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달달하고 진짜 맛있지?”
“자다가 일어나서 이게 무슨 맛인지도 몰라. 그리고 여보, 지금 새벽 4시야"
엄마는 딱 한 점만 드시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빠는 소주 한 잔을 탁 털어 넣고는 허허허 웃으셨다. 소주잔 뒤로 낚시를 끝내고 까만 고속도로를 달려왔을 아빠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나는 차가운 갈치회 한 점을 들어 꿀꺽 삼켰다. 아빠의 따스한 정이 목구멍을 타고 발끝까지 퍼졌다. 우리는 마지막 한 점이 남을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배를 타고 간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많이 잡았는지. 선장님은 어땠는지. 배 위에서 먹는 회는 여전히 맛있는지. 소주잔에 찰랑이는 소주만큼 아빠와 나의 대화도 적당한 유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벽 4시다. 아빠는 지금쯤 어디서 낚시를 하고 있을까.
오늘도 맛있는 갈치를 잔뜩 잡았을까.
이제는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다 어느새 창문으로 들어오는 하얀 빛에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