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사계절이 지나고, 이제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작은 글쓰기 수업이었다. 우리는 제주의 동쪽에 있는 서점, 소심한 책방의 한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 둘러앉았다. 책이 가득 쌓여있고 종이 냄새가 폴폴 날아다니는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였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 매주 서로의 글 한 편을 나눠 읽었다. 우리는 글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다. 말이 아닌 글로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았지만 글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나를 자꾸 글쓰기 수업으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제주에 내려와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시골에 집을 구했다. 논과 밭이 펼쳐지고 노루 가족이 뛰어놀고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중산간 마을이었다. 창문을 열면 온통 초록색 풀과 오래 그 자리를 지킨 나무들. 휘파람 소리를 내는 청아한 새들까지. 자연의 소리를 따라 마음속 깊은 응어리들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평생 소란함과 친구였던 나는 고요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고요는 나를 작은 공간으로 밀어 넣고 신혼 때 쓰던 2인용 식탁 의자에 앉혔다. 자, 이제부터 글을 쓸 거야. 그러니 네가 외향인이라는 사실은 지워버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어. 이건 분명 가스라이팅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안 되는 가스라이팅.
나는 ENFP다. 핸드폰 캘린더를 열면 월,화,수,목,금금금(금요일은 3건) 약속이 있는 파워 E다. 이런 외향적인 내가 글을 쓰고 있다. 사실 고요함을 벗 삼아 홀로 쓸쓸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내 삶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나는 외향인인데 글을 쓰며 선택적 내향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와 독서를 할 때만 나오는 내 안에 있는 내향인을 길어 올린다. 그래야만 글을 쓸 수 있었다. 제주에 와서 영원히 혼자이고 싶지 않았던 날들을 살아냈다. 켜켜이 쌓인 마음들이 조금씩 마음 밖으로 쏟아졌고 글이 되어 하얀 화면에 번져갔다. 코끝이 시큰해졌던 날들이 지나가고 입가에 미소를 찾을 때쯤 나는 온전한 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글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우울에서 밀어낸 건 분명 글이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글을 계속 쓸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종종 내 마음을 드러냈다. 이제 상실에 대한 글은 이 정도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아요. 이제는 다른 글을 쓰고 싶어요. 나는 그동안 두려움과 고통을 마주하는 글쓰기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였다.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쓰는 사람도 즐겁고 읽는 사람도 편안한 글. 나는 통증을 가진 글에서 한 발짝 떨어지기로 했다. 글의 주제가 변하듯 나도 변했다. 예전의 나로 돌아오면서 매일 애드벌룬처럼 하늘 위로 떠오르는 기분을 억지로 책상 앞으로 데려와 엉덩이를 묶어두는 일. 나는 이 일이 엔프피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삶을 개조해야만 지속할 수 있는 글쓰기다. 나의 글쓰기는 억지스러움을 동반한 이상한 행위였다.
이런 내가 싫지 않다. 나는 때론 글을 쓰고 때론 사람을 만난다. 그 안에서 나만의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다. 이제 나는 온전해졌으니 글을 그만 쓸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깝다. 제주에 온 지 2년, 간절한 마음으로 썼던 글쓰기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나의 고통을 덜어내고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글쓰기를 하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온실 속 화초 같았던 순간들이 펼쳐진다. 벚꽃이 피고 수국이 피고 동백꽃이 폈다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인생의 사계절이 스쳐 지나간다. 온실 속에 서 있는 나는 분명 지금과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아니요’다.
나는 나의 글쓰기가 좋다. 지금의 내가 좋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