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하게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모서리가 까끌까끌 거리지 않아 반듯한 곡선이 예쁘기까지 했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도 거슬림이 없었다. 시원한 바람은 동그란 바람길을 따라 마음껏 달려나갔다. 장난스레 오가는 바람을 나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 번 뻥 뚫린 마음이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니 채우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하며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마음의 구멍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이 제주로 도망치듯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제주의 공기는 따뜻했다.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차가워진 마음을 다시는 데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입도 4개월 차인 지금 나는 몰라보게 빠른 속도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갑자기 한꺼번에 괜찮아진다고?'
'이게 가능하다고?'
곰곰이 상황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제주로 와서 가만히 집에만 있었다. 가끔 근처를 산책하고 함덕 바다를 바라보는 정도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이곳이 편안했다. 나를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나의 이야기를 전할 필요도 나를 알고 싶어 할 필요가 없는 상태. 대기 중에 붕 떠서 편안한 상태. 딱 그 정도 였다.
괜찮았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혼자되신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 아직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과 내 가족의 생활을 돌보는 일. 그래서 나를 되돌리는 일을 게을리할 수 가 없었다. 충분히 아파할 시간도 충분히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와 공허함만 느끼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공허함은 상실감을 데리고 왔다. 상실은 또 다른 우울을 친구 삼아 데려왔다. 결국 돌고도는 쳇바퀴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마음. 그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밖으로 꺼내고 입으로 말해야 했다. 가리고 숨기면 영원히 마음속에 돌덩이가 되어 나를 오가지 못하게 눌러버릴 것이므로, 나는 이 돌을 치워버리기로 했다. 무겁고 검은 돌을 치우는 일만이 내일의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혼자서 도저히 들 수 없었던 무거운 돌이 있었다. 나는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들은 기꺼이 나의 돌을 함께 들어주었다. 다시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돌이 사라지고 난 지금의 나는 비로소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를 수 있게 되었다. 바닷물에 담긴 몸은 시원하고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른 얼굴을 내리쬐는 햇살은 따사롭다.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가 가득한 가을이 드디어 나에게도 찾아왔다.
지금의 나는 꽤 괜찮다.
우리의 과거는 이미 출판된 책입니다. 그 내용은 결코 바뀌지 않지요. 하지만 현재라는 책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매달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도록 내벼려 둘 것인지, 아니면 과거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조종하지 못하게 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더는 과거의 책을 읽고 또 읽지 맙시다. 이제 어린 시절의 책은 책장에 꽂아 두고 다른 책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파리의 심리학 카페(모드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