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보석을 얇게 잘라 흩뿌려놓은 듯한 봄이다.
마음은 어지럽고 머릿속은 철수세미처럼 뒤엉킨 겨울이 지나고 봄의 따뜻한 공기가 어깨를 감싸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느긋한 주말 오후를 보냈다. 주말에는 역시 짜파게티만 한 게 없다. 아프다가도 짜파게티를 먹으면 금방 회복하는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 참새처럼 하루종일 짹짹짹 거리는 딸들을 더 이상 집에만 두기에는 버거웠던 나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얘들아, 준비해. 우리 도서관 가자"
"좋아요 엄마"
서로 먼저 씻겠다며 전력질주하는 딸들에게 뛰지 말라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퍼지는 거실을 지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 같이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 속에 봄내음이 가득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다다르자 큰 벚꽃나무들이 예쁜 보석을 토해내고 있었다. 떨어지는 벚꽃과 바닥으로 떨어져 소복하게 쌓여있는 꽃잎을 번갈아 보았다. 영롱한 핑크빛 루비를 얇게 잘라놓은 것처럼 빛을 반사시키며 떨어지는 꽃잎이 마치 까만 밤하늘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별 같았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들도 부드럽고 가벼운 꽃잎을 반가워했다. 꽃잎이 주는 따뜻한 위로가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유난히 슬로모션으로 보이는 꽃잎들이 내년에 다시 만나자하며 귀엽게 살랑살랑 손인사를 전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조금씩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들은 루비꽃잎을 손으로 잡고 싶어 토끼처럼 폴짝거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면과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찬란하기까지 한 벚꽃비가 내리는 이 순간.
행복한 순간이 오면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된다.
진공상태가 되어 어떠한 사고도 할 수없이 멍해지고 시간과 공간이 멈춰버린 느낌. 가끔 나는 그 속에서 오롯이 혼자 서 있다.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 속에 있지만 눈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시간, 이 모든 것이 모순이다.
그때부터였을까.
하늘의 절반이 싹둑 잘려나간 이후로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고 있는 느낌이다. 외향적이었던 성격도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편해져 갔다.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멀쩡한 척을 하고 있지만 예전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49제를 잘 모시고 기도를 하는 동안 쉴 새 없이 배어 나오는 눈물도 원 없이 흘려보냈다. 아려오는 슬픔뒤에 눈물의 후련함도 맛보았다. 지금의 나는 사소한 일들이 무뎌져가는 감동 없는 일상을 지내고 있다. 나의 세계가 완전히 뒤틀려 재정비에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가진 유한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내가 되었다.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예뻤던 벚꽃이 이틀 만에 져버렸다.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아침마다 화려한 꽃길사이를 걸었지만 이내 새로운 나뭇가지와 새잎들로 갈아입은 벚나무가 더 늠름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꽃잎이 져야 새로운 푸른 잎이 생겨날 테고 햇빛을 향해 손을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도 한 뼘 더 길어질 테지. 새잎이 올라와 초록색으로 변해버린 벚꽃길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도 아빠라는 큰 나무에서 뻗어 나와 이제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저 나뭇가지가 지금 내 모습이 아닐까.
그래, 다시 봄이다.
그리워서도 슬퍼서도 아니다. 그저 아름다워서 행복해서 그래서 아빠생각이 났다. 조용히 펜을 들어 노트에 아빠라는 감정단어를 다시 써본다.
아빠 : 슬픔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운 것.
그리운 목소리와 따뜻한 온기가 저릿하게
마음을 통과하는 것.
사진출처_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