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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화상

by 여름의푸른색



“오늘부터 바로 항암 시작하시죠.”



담담한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아빠와 나는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이어지는 간호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쪽으로 가서 예약을 하고 저쪽으로 가서 수납을 하고 항암 주사는 몇 층으로 가야 하는지. 미로 같은 대학병원을 휘저으며 다녔던 그날의 기억이 눈을 감을 때마다 수면위로 떠오른다.


나는 치료를 시작하는 아빠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다만 아빠의 피로도를 고려해서 빠르고 정확한 동선에 따라 아빠를 모셨다. 많은 절차를 거쳐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항암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넓은 공간에 의자가 빼곡히 있었고 그 빼곡함 만큼의 환자와 보호자가 있었다. 다양한 나이의 환자들과 그보다 더 가늠할 수 없는 나이의 보호자들.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은 특유의 분위기에 나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말았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평온한 일상을 살아왔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치료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수를 넘어섰고,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암 환자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내가 살았던 세상은 허구라고 생각될 만큼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치료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을 사람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예민함을 뿜어내며 간호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이미 체념한 듯한 간호사의 표정과 ‘기다리세요’라는 다섯 글자의 암담함이 어쩔 수 없음이 환자를 짓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습기를 안은 말이 연이어 대기실 공기를 덮쳤고 그건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무게였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문을 열었을 뿐인데 문밖으로 펼쳐지는 세상은 숨이 막힐 만큼 복잡했고 생경했다. 무엇보다 나는 어떤 감정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환자가 겪는 고통을 대신할 수 없으니까. 환자의 고통에 보호자의 걱정을 얹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므로.


환자가 불구덩이 속에 홀로 서 있다. 보호자는 그 불 가까이에 서서 함께 견딘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화상을 입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투명한 화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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