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가방을 팔까?”
제주행을 결심한 후 나는 친구에게 가방을 팔겠다고 했다. 가방 팔아서 소고기나 사 먹겠다는 내게 친구는 절대 안 된다며 막아섰다.
“안돼, 절대 안 돼. 나중에 후회할 거야.”
‘후회. 과연 그럴까. 어차피 저승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데, 이깟 가방이 뭐라고.’ 이삿짐센터에서 귀중품은 따로 보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안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까만 케이스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이제 가방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이사를 가려니 모든 물건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예전에 좋았던 게 이제는 싫어지기라도 하는 걸까.
지방에서 온 내게 서울살이는 팍팍했다. 그래도 이곳의 반짝이는 눈부심이 좋았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도 고개를 들고 걷지 않는 사람들도 나름의 행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적당히 휩쓸려 다녔다. 삶이란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 중간은 가겠거니 생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화장을 끝내고 따뜻하다고 하기엔 뜨거웠던 유골함을 만졌던 날, 작은 유골함 안에 커다란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이승에서 입었던 옷, 걸쳤던 피부, 가느다란 속눈썹까지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가지 떠날 수 없었다.
아빠는 가벼운 입자가 되어 떠났으니 그 손에 무엇을 쥘 수 있었겠는가. 입관식 때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전해준 노잣돈과 아빠 친구분이 꼭 부탁한다며 나무로 만든 묵주 반지를 넣어드렸다. 모두 타버렸겠지. 그리고 재가 되었겠지. 인생의 경험을 쌓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한번 사는 인생, 잘살아 봐야지 당찬 포부를 외치며 매일매일 버텼다. 그런데 아빠의 마지막을 본 후에 내 마음은 달라졌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거라면 나는 남은 인생을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정답이 아니라면 나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었다. 나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벗어버렸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졌다. 그렇게 제주로 왔다.
고요한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 창을 열면 새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눈 앞에는 짙은 남색 바다가 펼쳐졌다. 시골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365일 화장을 했던 나는 제주에 온 이후로 화장과 조용히 멀어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화장을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오일장에서 오천 원짜리 냉장고 바지를 사서 여름 내내 입었다. 얼마나 시원하고 편한지 육지 친구들에게도 하나씩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갖춰진 옷차림에서 벗어났고 서울에서 겨울내내 입던 두꺼운 패딩도 옷장에서 나올 기회가 없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왔을 뿐인데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변했다. 그 안에서 나는 묘한 자유를 발견했다. 겹겹이 두드렸던 화장을 깨끗이 닦아내고 진짜 내가 나로 살아가게 되었다.
텃밭을 넘어오는 거름 냄새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죽음’은 내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 뒤를 ‘글쓰기’와 ‘독서’가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유한한 삶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생각보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 건강할 때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해보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것.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 중에 대단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다만, 가치관이 변했고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불안도 줄어들었다. 서울에서 경쟁하듯 버티던 삶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는 삶으로 변했다.
아빠가 떠나며 내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다. 진짜 ‘내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이제 6월이면 제주에 온 지 2년째다. 사계절이 두 번 지나갔다. 다시 살아보고 싶다. 지금까지와 다른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다.
이제야 아빠가 내게 남기고 간 삶의 의미를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