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뭘 하라는 거야."
쾅!. 터벅터벅.
회사 복도를 지나가던 차였다. 옆에는 여섯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 세 개가 나란히 있었고, 그중 제일 끝 회의실에서 들리던 소리였다. 어찌나 문을 세게 닫았는지 옆에 있는 다른 문들까지 흔들거릴 정도였다.
세상에. 회사에서 저렇게 감정을 토해내다니. 도대체 누구인가. 무슨 일인가.
회의실 안을 들여다보니 남자 팀장과 차장 두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앉아 있었다. 방금 큰 소리와 함께 부문 식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은 6개월 전 교육팀으로 합류한, 관심사병으로 불리는 남자 대리였다.
윤 대리 이야기
그는 10년 전 이 회사에 입사했다. 부산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있는 대학교 졸업장을 땄고, 부모의 기대 속에 이름 있는 회사로의 취업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와 면접 끝에 드디어 취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바라던 흰색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곳은 아니었다. 회색 라운드 티에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출퇴근을 했다. 현장에서 물건을 분류하고 매장을 정리하는 현장직으로 입사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일이면 무엇이든 도전부터 하는 그에게 일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매일 몇 안 되는 사람들과 부대끼긴 했으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친화력이 뛰어나고 말하기도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금세 사랑받는 막둥이로 자리 잡았다. 약간의 정성을 들이기만 하면 칭찬을 자주 받곤 했으니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삼 년째 즈음 되었을 무렵 답답함과 무료함이 밀려왔다. 매일 행해야 하는 단순한 루틴들과 본사에서 내려주는 일들만 쳐내는 일상 속에서 마치 자신이 하나의 부품이 된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내 게시판에 띄워진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 강사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단 열 명만.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이 느껴졌다. 이 지루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다 싶었다.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작성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소위 말하는 일잘러로 정평이 나 있던 그였다. 밝은 이미지는 물론이고 뛰어난 말주변까지 소유했었다. 사내강사 합격이라는 결과는 물 흐르듯 당연한 것이었다.
사내 강사 교육을 받은 후 그의 가슴에 열망이라는 작은 불씨가 틔워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에 매일이 설레었다. 강의를 할 때면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수십 번의 강의를 개발하고 교육을 진행하며, 그는 확신하고 다짐했다. 교육팀으로 가자.
그때부터였다. 틈날 때마다 인트라넷의 팀 조직도를 펼쳤다. 교육팀에 몇 명이나 일을 하고 있는지, 혹시 나간 사람은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직원들에게 공석을 알리고 지원서를 받는 사내공모 게시판도 수어번 들락거렸다. 그러나 기회는 쉬이 찾아지질 않았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그의 희망의 끈을.
그렇게 현장 생활 5년을 맞이하던 날, 강사양성과정의 강의를 맡았던 차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대리님, 지금 교육팀에 자리가 하나 생겼는데, 혹시 관심 있으세요?"
"예? 네!!!! 그럼요."
"그럼, 본사로 언제 올라오실 수 있으세요? 팀장님이랑 통화 한번 하실래요?"
"네! 네! 알겠습니다!"
행운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바라던 교육팀이라니. 교육 팀장과의 통화는 약 10분 만에 끝났다. 이미 윤 대리에 대해 익히 들었는지 자신을 알아보기 위한 목적의 통화는 아니었다. 그저, 언제 올 수 있는지, 무슨 일을 맡게 될 건지에 대한 질문만 받았다. 최대한 빨리 이동할 것을 부탁했다. 그렇겠다고 했다. 아니면 사라져 버릴 기회일 것만 같았다.
사실, 부산에 가족이 있었다. 2년 전 결혼을 했고, 어렵게 얻은 딸도 있었다. 만약 서울로 올라간다면 그리도 힘들다는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내에게 자신의 절실함을 이야기, 아니, 통보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재정적 여유도 많지 않았다.
회사 근처에 침대 하나 간신히 들어가는 저렴한 방을 구했다. 그에게 머물 곳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본사로 출근하던 첫날. 빳빳하게 다린 흰색 셔츠에 남색 정장을 입고 먼지하나 앉지 못할 정도로 닦은 구두를 또각거리며 입구로 들어섰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된 반면, 이유 모를 자신감이 그를 부추겨 댔다. 아마도 몇 년 간 마음속으로 상상해 오던 업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드디어 교육팀에 도착했다. 본인을 환하게 반기는 팀장님과 팀원분들,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붙어 있는 책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했다. 부문에 속한 모든 직원 분들과 눈 맞추고 인사할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모습에 그의 기대감은 한껏 더 고조되었다.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세 달 즈음되었을까.
갑갑한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일 아침 되뇌었다.
'괜찮아. 내가 원해서 온 곳이잖아. 이 일을 해오고 싶어 했잖아. 이 또한 지나갈 거야. 괜찮아. 오늘도 파이팅 해보자. '
몇 달 사이에 팀 상황은 수어개의 실타래가 엉킨 듯 엉망이 되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외부에서 영입된 임원은 교육팀의 업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를 뽑은 팀장은 갑자기 회사를 떠나게 되었고, 팀 내에서 가장 시니어라는 이유로 교육 업무 경력이 1년도 되지 않은 분이 팀장 자리에 앉았다.
팀의 분위기는 날로 어두워져만 갔다.
임원과 팀장 간 신뢰가 높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다. 팀에서 보고한 10개 중 9.99개의 안건들은 승인되지 않은 채 다시 돌아왔다. 팀장은 임원으로부터 받는 압박감이 커질수록 팀원들에게 요구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하나의 보고서를 위해 수 십 개의 참고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1안, 2안, 아니, 어쩔 때는 27안까지 만든 적도 있었다. 팀원들은 팀장이 시키는 대로, 바라는 대로 했다. 겉으로는 말이다.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불만은 그와 비례하게, 두 배, 세 배로 두꺼워져만 갔다.
예전부터 옳은 말을 숨기지 못하던 그였다. 과거 상사들이 그의 책임감, 성실함, 일머리 등 모든 것을 좋아했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단 하나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상사의 지시에 반대 의견을 냈던 것이었다. 까라면 까라는 것을 따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이다.
현장에 있는 직원들의 직무 교육을 수립하던 중이었다. 팀장이 지시한 방향이 맞지 않아 보였다. 이론적으로는 멋들어졌지만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내용인 지, 운영이 가능할 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미팅 자리에서는 그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입을 꾹 닫았다.
그렇게 '수립'만 한 달 동안 계속되던 중, 그의 속에 천불이 나고야 말았다. 팀장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만든 '현실적인' 운영안을 들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이렇게 진행해 보면 어떨까요. 조금 변경을 해 보았습니다."
팀장은 두꺼운 검정 뿔테 너머로 눈을 추켜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윤 대리. 이거 전무님에게 들고 가면 백 프로 리젝이야. 윤 대리가 보고할 거야?"
이번만큼은 그도 지지 않았다.
"아... 그게 아니고요... 기존에 작성되었던 기획안에 있는 교육과목은 현장 직원들에게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일 하면서 알고 있는 것들이에요. 그걸 또 모여서 들으라고 하면 일도 바쁜데 왜 모아놓고 이런 걸 교육하냐 할 거예요."
팀장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게 현장을 잘 알아? 나도 거기서 매니저까지 하던 사람이야. 어디서.. "
팀장의 사설이 길어지려는데 옆에 있던 오 차장이 윤 대리의 팔을 잡아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 그를 교육팀으로 데려온 분이었다.
"아, 팀장님. 제가 윤 대리와 다시 얘기해 볼게요. 팀장님께는 보완된 내용으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팀장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인지하는 듯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오 차장은 윤 대리에게 고갯짓을 하며 자리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윤 대리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 대며 자리에 앉았다. 감정이 쉬이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이후 그의 직장 생활은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적정선을 보면서 반대 의견을 내야 했던 것일까.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제안했던 것이었을까.
그가 가져가는 모든 보고에서 돌아오는 답은 다시, 다시, 다시였다. 심지어 자신이 맡고 있던 일이 다른 과장에게 넘겨지기도 했다. 일로 보여주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노력했다. 매일 밤 10시, 11시까지의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도 반납했다. 팀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뱉어내는 말투, 눈빛, 행동 모든 것을 살얼음 걷듯 조심했다. 어렵게 맡게 된 교육이라는 직무였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 달, 네 달, 1년이 지나도 이 생활은 반복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부서로 첫 출근하던 날 그의 어깨 위에 있던 설렘과 자신감은 어느새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반복되는 거절과 실패가 그의 몸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화난 듯한 눈빛과 아래로 축 처진 표정에 그의 주변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듯했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적응을 잘 못하나 봐,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대. 아직도 자리를 잘 못 잡았다면서? 사무직에는 잘 맞지 않나 보다'라는 류의 말들과 함께 말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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