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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Jan 07. 2024

팀장보다 나이 많은 차장의 뒷심 (2)


팀원과 팀장으로 만나다.


회의실로 들어섰다. 박 차장님은 언제 오셨는지 벌써 자리에 앉아 계셨다.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장님과 나, 단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반가운 마음보다 어색함이 배로 컸다. 선배와 후배가 직책이 뒤바뀐 모습으로 자리하게 된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일단 인사부터 하자. 


"차장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이렇게 한 팀에서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하하."

"아, 네. 그렇네요."


차장님은 옅은 미소만 짓고 계셨다. 나보다 더 불편해하고 계신 게 분명했다.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억지로 이 상황에 대한 감정을 풀어내어 봤자 오히려 그 어색함이 더 두꺼워질 것만 같았다. 일 이야기부터 하자. 정중히, 그리고 명확하게. 


"차장님, 저는 차장님과 직접 일을 해 보진 않았지만, 차장님은 우리 팀에 반드시 계셔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교육 업무도 오래 하셨으니, 과정의 내용이나 운영방식, 특히 개선할 점에 대해 가장 많이 아실 거고요. 그래서 제가 차장님께 의지를 많이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인 기획 쪽을 맡아주셨으면 해요."


차장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나는 좀 더 솔직해 지기로 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차장님이 어떤 상황이신 지 아주 조금은.. 알아요. 저는, 윗 분들이 차장님의 진가를 잊고 계신 거라고 생각해요. 차장님의 열정과 성과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제가 중간에서 최대한 노력할게요.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저랑 일단 1년만 같이 일해봐요."


믿고 있었다. 차장님이 갖고 계신 장점들을. 신입 때 보여주었던 일에 대한 무서운 몰입도, 책임감이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급여팀에서 자리에 앉아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시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사실, 당시 나의 상사는 차장님과 일 하기 쉽지 않을 거라며, 적당한 일만 주라고 지시했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내보내자고 하셨다. 하지만 차장님은 내가 이 팀을 꾸려가고 자리를 잡게 하는데 엄청난 지원군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상사에게 아니라고, 한 번 같이 해보겠다고, 1년 기회를 달라고 말해둔 상태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차장님께는 팀에 부여되는 기획 업무들을 주로 맡겼다. 새로운 교육 운영안을 작성하거나, 급한 보고자료 작성을 서포트하는 것들이었다. 역시나였다. 차장님은 일의 방향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를 작성하는 속도와 완성도까지 완벽했다. 심지어 내가 놓치는 부분까지 먼저 찾아내어 주시기도 했다. 차장님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보인다, 희망이.


어느 날, 상무님이 나를 급히 찾으셨다. 


"김 팀장, 직원들 역량평가 모델을 다시 좀 만들어야 하는데, 김 팀장이 좀 해봐요. 일정과 내용 등 기획안을 2주 내에 갖고 오라네요. 빨리 해야 하는 건이니, 프로젝트 멤버도 꾸리고. 누가 좋을까요?"


머릿속에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상무님이 승인할 지에 대한 망설임이 앞섰다. 그래도 일단 내뱉기나 해보자 싶었다. 


"그... 박혜진 차장에게 부 리더를 맡기고..."

"박 차장? 잘하겠어요?"


"아, 네. 상무님.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반년 가량 함께 일 해보니 팀에서는 거의 탑입니다. 현재 저희 팀에서 하고 있는 변화 업무들은 모두 박 차장과 함께 하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김 팀장이 그렇다고 하면..."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네가 데리고 일할 멤버이니 한 번 알아서 해 봐라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의도적이었다. 차장님을 프로젝트 멤버로 추천한 것은. 

저평가되고 있는 그녀의 실력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자료 서칭과 분석, 보고서 작성까지 팀 내에서 그 누구보다 월등히 잘 해내실 분이었다. 그저 오래된 만년 차장이 아닌, 성과 또한 발휘하는 분이라는 것을 윗분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뿐만 아니었다. 차장님에게도 신나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모두 그녀의 몫이었던 그때처럼. 박 대리 시절의 멋진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차장님께 프로젝트를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신보다 후배인 팀장과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갈 것이며 지시받는 횟수 또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미 바닥으로 주저앉은 차장님의 자존감을 자칫 잘못 건드리게 될까 우려되었다.


고민 끝에, 차장님을 포함한 네 명의 멤버들이 모인 첫 미팅에서 각자의 역할과 일하는 방식을 공식적으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필요한 전문가 섭외나 자료 제공까지 모두 적극 지원해 주시겠다고 하니, 배울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프로젝트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제안할게요. 

저는 프로젝트의 목적과 방향성을 윗분들에게 전달받고 멤버 간의 업무 배분, 일정관리, 보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모인 멤버 모두가 잘하실 거라고 알고 있으나, 조정 또한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즉시 피드백을 하고 보완하는 절차를 거치겠습니다."


사실, 차장님을 염두하고 한 말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차장님만 따로 뵙고 말씀드리기보다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공표하는 것이 낫겠다 판단되었다. 그래야 업무를 지시하는 나와, 이를 받아들이는 차장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어려운 감정이 어긋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은 계획에 따라 발맞추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차장님의 업무능력은 단연 빛났고, 프로젝트 부 리더로서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해 주셨다. 무엇보다 특유의 책임감과 긍정 마인드가 돋보였다. 하기 어려워 보이는 막연한 임무가 주어졌을 때에도 '하면 되죠. 일단 시작부터 해봐요.'라는 힘찬 말과 함께 멤버들을 이끌었다. 가려져 있던 실력이 하나씩 꺼내어질 때마다 나는 물론 멤버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토닥이고 밀어주며 업무를 완수해 냈다. 


우리가 수립한 역량 평가 제도는 그야말로 역작이었다. 사장 보고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전체 사업장의 채용, 승진 면접은 물론 성과평가에도 활용되었다. 프로젝트 결과를 보고 할 때마다 멤버들의 역할과 성과를 자세히 보고했다. 당연히 박 차장님의 성과가 가장 돋보였다. 


이제 됐다 싶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큰 바람이었을까.

첫 해 차장님에게 주어진 고과 결과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평균 미만으로 부여된 것이다. 프로젝트에서 그녀가 해낸 성과물과 주변에 미친 영향까지 수없이 언급해도 반영되지 않았다. 고과는 한 해동 안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인데 프로젝트 기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긴 경력 대비 성과나 기여도가 특출 나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이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내야지만 조직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경고같이 들리기도 했다.


평가 결과를 차장님께 통보해야 하는 날, 작은 회의실 안에 흰색 책상을 가운데 두고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어두운 내 표정에서 이미 짐작을 하셨는지 차장님의 시선 또한 아래를 향하고만 있었다. 사실, 중간 평가 면담 자리에서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전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확정된 고과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조심스레 입을 떼였다. 전할 내용을 미리 노트에 적어보기도 하고 연습까지 했음에도, 문장들을 입 밖으로 내보내기가 힘겨웠다.


“...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해주셨지만, 아직은 제가 차장님의 성과를 더 잘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내년에는, 분명히 차장님이 어떤 기여를 하셨는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차장님이 우리 팀에서 일을 가장 잘하고 계시다고 확신해요. 하지만 회사에서는 긴 경력만큼 더 높은 아웃풋을 내야 한다고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좀 더 잘 드러내 볼게요... "라고 천천히, 더듬더듬 전하였다.



갑자기 차장님의 고개가 아래로 푹 숙여졌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차장님은 연신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셨다. 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나도 이를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울먹임을 가까스로 잠재운 채 말씀하셨다.


“솔직히 팀장님,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윗 분들은 저처럼 경력이 오래되고 연봉이 높은 직원들을 내보내고 싶으실 거예요.

팀장님이 저의 성과를 얼마나 잘 보여주려고 하셨는지 알아요. 저도 그에 맞춰서 잘하려고 아등바등 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분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팀장님이 수십, 수백 번 저의 성과를 말씀하셔도 말이에요.”


사실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차장님이 하신 말씀이 모두 맞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차장님은 평소와 같이 평온한 표정을 하고 출근하셨다. 어제보다 한결 감정이 추슬러진 듯 보였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일을 시작하는데, 차장님이 보낸 채팅 메시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팀장님,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언제나 그렇듯 제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언젠가 알아주시겠죠. 그리고, 어제 너무 민망한 모습 보인 것 같아 마음이 좀 그렇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갔다.


차장님은 아직도 나와 함께 일을 하고 계신다. 3년 전 보다 손발이 더 잘 맞는다.

그리고, 차장님은 작년에 가장 높은 고과를 받으셨다. 드디어 윗분들이 진가를 알아보신 것이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많이 힘드셨을 것이 분명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을 것이다. 혹시나 팀에 누가 될까, 혹은 팀장인 내가 난감해질까 하는 부담이 컸을 테다. 후배인 팀장에게 업무 지시를 받고 수행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어렵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더더욱 일에 집중했다. 팀 내 후배들의 업무도 자신의 일처럼 봐주셨다. 일의 퀄리티 또한 돋보였다.


처음엔 윗분들도 쉬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래도 끊임없이 그녀의 성과를 보여드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자주 언급하였다. 매년 쌓여가는 우수한 결과들은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더 이상 저평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임원 분들은 지금도 한 번씩 그녀의 허점이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박 차장, 잘해? 더 성과 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말이다. 비판 섞인 말들이 마음을 콕콕 쑤시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자리를 박차고 따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아직도 알아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우리 팀을 위해, 우리 부서를 위해, 회사를 위해 헌신해 오신 차장님의 노력과 시간을요.' 


그때마다 속으로만 삭이며 다짐한다. 틈틈이 보여드릴 거다. 내가. 그녀가 해 내고 있는 결과들과 그에 못지않게 빛나는 열정을 말이다. 



그게 차장님을 위해, 우리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역할이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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