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 여신, 박 대리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평소 듣지 못했던 경쾌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지? 옆 팀을 바라보니 마치 개안한 듯 두 눈이 환해졌다. 그저 한 사람이 들어와 서 있을 뿐인데 평소 어두웠던 인사팀의 명도까지 달라져 있었다.
하늘하늘한 화이트 블라우스, 흑갈색의 긴 생머리, 생기 가득한 뽀얀 피부에 까맣고 큰 눈동자. 여신 강림인가. 한 동안 멍하니 그녀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동기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야, 이 주임, 저 사람 누구야?"
동기 역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아직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답했다.
"진짜 몰라? 박혜진 대리. 공채 여신!"
박 대리님은 나보다 다섯 해나 먼저 이곳에 입사한 공채 선배이다. 전설의 엘리트. 그녀는 입사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고대 출신에 4년 모두 장학생으로 졸업, 영어에 중국어까지 섭렵한 고스펙 보유자였다. 뿐만 아니었다. 세 종류의 입사면접에서 면접관 모두에게 만점을 받은, 창립 이래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주인공이었다. 게다가 항상 웃는 얼굴에 성격은 쾌활 털털 그 자체였으니 그야말로 탑 오브 탑이었다.
인사팀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매년 신입사원 교육에서 우수한 인재만 쏙쏙 데려가는 곳이니. 박 대리님의 첫 임무는 입문교육이었다. 주변에서는 스펙만 좋을 뿐 일머리는 없을 거라는 이상한 소문도 돌았었다. 워낙 넘사벽이기에 시기와 질투가 따라다녔던 거다. 그러나 그녀는 무성한 말들을 보란 듯이 제압해 버렸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고 할까. 새로운 일은 스펀지처럼 쫙쫙 흡수하고 하는 일마다 우수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경력사원 같은 신입. 열정, 성실, 끈기, 긍정. 이 모든 단어들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이후, 마치 정해진 수순인 마냥, 최연소 매니저 승진을 이뤄냈다. 인사에서 중요하다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모두 그녀의 몫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박 대리님의 아름도고도 화려한 이력들이다. 그때의 나는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도 박 대리님처럼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후 나는 박 대리님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연예인을 향한 팬심 같았다고나 할까. 사실,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하길래 저리도 잘 나갈 수 있는지 따라 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러나 업무의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근무지 또한 연수원과 본사였으니 말을 섞을 기회조차 찾지 못했다. 그저 어쩌다 한 번씩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
그로부터 4년 뒤, 동기들과의 오랜만의 점심에 들뜬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날이었다. 문이 열리자 환한 빛이 비치었다. 고개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서 있었다. 나의 우상 박 대리님.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했고, 그녀 역시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 뭐지. 하고 고개를 양 옆으로 까닥이는 찰나, 그때였다. 동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박 과장님, 발령 났다더니 본사로 오는 거였어?"
"응, 급여팀 운영파트래. 임신했잖아. 교육팀은 출장도 자주 가고 계속 서 있고, 몸 쓰는 일이 많은데 아무래도 좀 그랬나 봐."
"아... 거기 근데, 사원들만 있는데 아니었어?"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에휴,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그 짱짱하던 사람도 이렇게 되는구나."
얘기는 들었었다. 박 대리님은 과장으로 승진도 하고 일에서는 잘 나갔지만 한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맘고생이 심했다고.
어렵게 임신을 해서인지 출장이 잦은 교육팀이 아닌 다른 직무로의 전환을 본인이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석이 쉬이 생기지 않았고, 어렵게 찾은 곳이 급여팀이었던 거다. 자잘한 지원 업무들만 하는 부서였지만, 곧 육아휴직을 앞두고 있었기에 잠시 머물 곳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그 마음이 어떨지.. 얼마나 속상할까, 얼마나 허무할까.
그렇게 그녀와 난 같은 층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뒤 박 과장님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대리 승진 시험에 면접 준비에 한창 바빴다. 매니저 직책도 맡게 되어 후배들과 신나게, 즐겁게 일을 하며 매일매일을 지냈다. 박 과장님은 어느새 나의 머릿속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조금 많이 달라진 박 차장님
밖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회사 로비 옆 회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흑발의 긴 생머리에 검은색 니트를 입은 분이었다.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린 그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는 침침한 안개가 끼어 있는 듯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일부러 옆으로 지나가며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았다. 세상에. 박 과장님, 아니. 지금은 차장이 된 박 차장님이었다.
그녀는 첫째 아이를 낳은 후 1년 반 동안 육아휴직을 가졌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 뱃속 아이가 건강하지 않아 입원을 반복해야만 했고 육아휴직까지 이어 쓰는 사이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회사로 복귀하길 원했으나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가 부모님 모두 시골에 계셨고 남편은 해외 근무를 했기에 자신이 육아를 모두 책임져야 했던 거다.
모성보호라는 테두리 안에서 휴직기간도 재직기간으로 인정되어 직급은 올라갔다. 직무는 대리 시절 맡았던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느새 차장이라는 직급을 달게 된 것이다.
복직한 부서는 휴직 전 잠시 머물 곳으로 여겼던 급여팀이었다. 오랜 휴직으로 이미 그녀의 자리는 다른 직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즉, 맡은 일이 없다는 뜻. 복도의 소파에 앉아있던 박 차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은 이 조직에 없어도 되는 존재라고 느끼며 공허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탕비실에 들어가 정수기에서 물을 뜨고 있는데 테이블 안쪽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급여팀 팀장이었다.
"허 팀장. 박 차장 갈 곳 없나? 열심히는 하는데 사실 부담스러워. 지금 딱 줄 일도 없고... 주임, 대리들도 키워야 하고... "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 천하의 박 대리님이 어느새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니... 공채 여신이다, 핵심인재다 라며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서로 안 받으려고 하다니. 세상 허무하게 느껴졌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 박 차장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자리에 앉아계셨다.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발아 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계셨다. 아마, 팀 내 회의비를 모아서 정리하고 있을 테지...
얼마 후, 회사 내 이상한 말들이 돌았다. 희망퇴직, 조직개편.
입사 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각 부서의 분위기도 살벌해졌다. 본부별로 인원감축이라는 과제가 떨어진 것이다. 가장 먼저 고려되는 대상은 연봉은 높지만 그에 준하는 일을 맡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직원들은 매년 평균 인상률만큼 연봉이 올라간다. 재직기간이 길어질수록 연봉 또한 높다는 말이다. 박 차장님은 누가 보기에도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1순위였다. 입사 15년 차인데 주임이 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직개편이 되면서 그녀의 직무가 바뀌기는 했다. 다시 교육팀으로. 그러나 반갑지만은 않았을 테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직원을, 게다가 공채 후배를 팀장으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나가라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충성해 온 이 회사에 대한 억울함과 아쉬움이 컸으리라.
박 차장님을 팀원으로 맞이하게 된 팀장 또한 마음이 먹먹했다. 자신의 우상이었다.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한껏 풀 죽은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차장님과 나는 그제야 가까이에서, 한 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