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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와와 Aug 10. 2024

준비된 이별이기에 더 아프다

오늘도 그리움입니다.

다시 돌아온 병원

날 그저 반겨 주시던 어르신들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잊지 않고 날 기억해 주시고 내 이름까지 잊지 않으셨던 이@@, 나@@ 어르신..


어르신들의 세월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이 지나버렸나 보다. 이젠 혼자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하시는 두 어르신들을 보며 맘이 아팠다.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매일 아침 내 목소리에 제일 먼저 인사해 주시던 분들이었다. 늘 날 보면 자동 하이파이브를 하시며 웃어 주시던 그런 어르신들이었다.


이@@님은 5년 전 부부동반으로 2인실에 입원을 하셨다. 할머님은 입원당시 이미 치매말기 상태로,  언어기능도, 일상생활능력도, 운동적 기능도 다 잃으신 상태였다 그런 할머님을 함께 입원하신 이@@님이 늘 살뜰히 보살피셨다. 그러나 6개월을  함께 하지 못하시고 할머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렇게 2인실이 아닌 남자병실로 옮기셨던 이@@님, 물론 보호자 분들은 2인실이나 1인실을 원하시는 상태였으나 그 당시 이@@님이 우울감이 심하셔서 혼자 있는 것보단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보호자분들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더니 내 의견을 따라 주셨다.


이@@자제분들은 너무나 효자, 효녀들이었다. 매일 돌아가면서 간식이며, 반찬들 해서 방문하셨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가 적적하실까 봐 수시로 찾아와 말동무를 해드리고, 산책을 시켜 드리고, 저녁 식사까지 마치셔야 병원문을 나가셨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가 다시 돌아간 그때 까지도 말이다.

자식들의 관심과 사랑에도 이@@님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그 좋아하던 간식을 더 이상 드시지 못하고, 이젠 미음조차도 제대로 삼키는 게 힘들어 지신 이@@어르신,  매일 영양제에 의지해 겨우 겨우 영양공급을 받으시던 이@@님에게 담당의는 콧줄을 권했다.  하지만 강력히 보호자분들은 거부했다.

그 이유는, 어머님 때 콧줄에 나중에 인공호읍기계까지 정말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다 했으나 결국은 돌아가셨고, 마지막까지 온갖 호수들때문에  고통스러워하셨단걸 지켜봤기에, 또한 이@@님이 생전에 유언처럼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절대 본인은 그 어떤 연명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자녀분들은 어르신들이 뜻을 존중해서 하지 않겠다고 버티시던 중이었다.


어르신은 하루하루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 이젠 내 목소리를 들어도 고개를 돌리시지도 웃어주시지도 않을 만큼..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 대로 난 기저귀 착용하신 어르신들의 엉덩이를 살펴 보던 중 이@@ 어르신의 엉덩이 피부색이 변하고 있는 게 보였다. 며칠 전부터 열감까지 있으셔서 매일 항생제 주사에, 아이스 팩까지 하고 있던 어르신, 아무리 체위변경을 열심히 하고, 영양제를 주입하곤 있으나 하루종일 침상에 누워 계시고, 식사를 못하시는 어르신은 이제 온몸의 혈액순환이 되질 않아 정말 불씨가 꺼져 가는 중이었다.

보통 이 정도의 컨디션이 되면 중환자실로 올라가셨어야 하나, 따님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 담당의에게 사정하셨다. 워낙 지금 병동을 좋아하셨고, 익숙한 곳에서 최대한 버텨 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호흡소리조차 희미해져만 가는 어르신들을 그저 지켜보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매일 퇴근하면서 어르신께 작별인사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어르신 덕분에 행복했다고, 이젠 평안히 쉬시라고...

그러던 어느 날, 어르신 엉덩이 색이 보라색을 변해있고, 꼬리뼈 부근에도 욕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정말 어르신 몸 전체를 먹어 버릴 것 같은 욕창...  이 날도 어김없이 따님들과 아드님이 다녀가셨다.

내내 옆에서 울기만 하다가 나가시는 걸 잡았다. " 이젠 중환자실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옆에 어르신들도 많이들 불안해하시기도 하고, 더 이상 이제 제가 아부지 더 이상 못 보겠어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따님들이 우시면서 " 선생님이 못 보시겠다면 그렇게 해야죠. 아이고 울 아버지, 엄마 보고 싶으실 텐데.. 저리 버티시네요. 그럼 선생님 내일 옮길게요. 내일, 오늘까지만 좀 봐주세요 " 하고 돌아가셨다.


늘 그랬듯 난 어르신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정말 마지막 인사를 " 아부지 , 저 이제 퇴근해요.  내일 저 오프라 아부지 못 볼 수도 있어요. 아부지 이제 그만 할머니 보러 가셔야죠. 할머니 오래 기다리고 계신데요. 아부지 지금 몸에 욕창 생기고 있어요. 피부 벗겨지기 시작하고, 진물 나면 진짜 몸 금방 상해요 아부지. 그러고 할머님한테 가면 할머니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 깨끗하실 때 가서 만나셔야죠. 이제 그만 가십시다. 네? 아부지..이제 그만 편안하게 할머니 곁으로 가시게요. 아부지~ "라고 말이다.


그다음 날 오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말이다.  그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내 감정은 죄책감, 내가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한 것 같은 그리고 그다음엔 그리움이었다.

이젠 어르신을 뵙지 못한다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어르신과의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작별 인사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별은 너무 아팠다. 원래 환자분의 장례식은 가지 않지만, 이날 난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렇게 따님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따님이 조심스레 입을 떼셨다 " 서 선생님, 감사해요. 정말.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아버지 생각해 주셔서, 간병사님한테 들었어요. 선생님이 어제 퇴근하시면서 아버지한테 가시자고 하셨다면서요 너무 감사했어요. 저희도 어머님 곁에 이제 그만 가시라고 하고 싶었는데 못했거든요. 아마 선생님이 그리 말씀해주셔서 울아버지가 선생님 말 들은 것 같아요. 울 아버지 늘 선생님 말이라면 잘 들으셨잖아요. ".....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곧이어 작은 따님이 오시더니 날 안으시며, 또 그렇게 한참을 우셨다. 난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2시간을 따님들과 함께 울었다.  


어르신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쓰라리고 아프다. 하지만, 내가 이분들 곁에 있는 동안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들만큼 이렇게 헤어짐도 많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그림움으로 남는다. 매일매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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