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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와와 Aug 24. 2024

오늘도 난 그 길을 걷는 중입니다.

감히 이 길이 천직이라 확신하며  

내 안에 꿈틀거리던 꿈을 향한 욕망과  어쩌면 약간의 허세 같은 자존심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결국 병원을 등지고 나와버렸다. 이미 내 몸과 마음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조차 없이 무작정 그렇게 사표를 던졌다. 

사직하고 몇 주는 보호자분께 계속 전화가 왔다. 혹 다른 곳으로 간 거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테니 알려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이제 더 이상 병원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시 가야 한다면, 그건 내가 운영하는 내 시설일 것이다.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는 중에 지도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지역사회 노인들을 위한 건강사업하는데, 같이 참여하지 않겠냐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두 달 동안 내가 맡은 중재 프로그램개발을 위해 논문도 찾고, 하루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며 온갖 정부기관 사이트들을 뒤지며 애썼지만 내내 제자리걸음이었다. 함께 사업에 참여 중인 다른 대학원생들은 매주 미팅시간마다 자신의 맡은 업무의 진행과정을 이야기하며  뭔가 만들어지는 모습이었지만  나만 아무런 진전 없이 계속 같은 곳에 멈춰 있었다. 진행결과와는 상관없이 한여름엔 우린 모두 현장에 투입되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느 한여름날, 1차 파일럿을 위해 시골 농촌 마을 회관을 방문해서야 내가 이 사업에 투입된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어르신들 속에서 난 혼자 신이 나 들떠 있었던 시간들

함께 갔던 다른 박사님들이 날 보며 다들 한마디 씩 했다. 

" 서 선생님은 현장 나오니 완전 날아다니시네요~"  파일럿 작업이라 현장 분위기만 파악하고, 한 명당 검사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정도만 파악하는 게 목표였으나, 적극적인 마을 이장님이 방송을 두 차례나 하셨던 터라  미친 듯이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를 뚫고 어르신들은 끊임없이 마을 회관으로 몰려오셨다. 

모든 게 처음이라 기계들은 제대로 작동해 주질 않고, 설문지 내용이 많아 좀처럼 속도는 나질 않고 어르신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좁은 마을회관 안을 꽉 채운 어르신들, 날은 덥고 습하고 한분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대기 중인 어르신들을 한 곳에 모아 지루하지 않게 준비해 간 간식을 나눠 드리고, 노래도 부르며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냈다. 

거진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어르신들의 검사가 마무리되고 다들 짐을 챙기는데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만 빼고,  난 오랜만에 만난 어르신들 속에서 그저 행복한 시간들이어서 감사함 뿐이었다.

작년 그 뜨거웠던 여름날들을 나는 홍성군 어르신들과 함께 했다. 매일 250km을 달렸던 덕분에 내 차 브레이크 페달이 닳아 교체하고, 엔진이 과열되어 터질 뻔했을 만큼  나는 열정적인 여름을 보냈다. 1000명의 어르신을 만나고서 현장의 일은 끝이 났다. 또다시 시작된 컴퓨터와 데이터씨름의 시간들.... 눈알은 빠질 것 같고 도무지 진도는 나가질 않고 앉아 있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했다. 주중 내내 컴퓨터에만 앉아 있으니 몸은 더 망가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열심히는 하고 있으나 전혀 즐겁지는 않던 그 시간들, 그렇게 추석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며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문요한 <오티움>을 읽던 중이었다.  그때 내가 만난 문장 " 누군가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기쁘게 할 때 최고의 나를 만날 수 있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 꿈은 치매어르신들을 위한 시설인데 정작 나는 지금 어르신들 곁이 아닌, 학교 연구실에서 이렇게 데이터들과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그 순간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풀타임 학생으로 시작한 박사과정이었기에 주중에는 수업 들으며 연구실일들을 하고, 주말에는 치매 어르신들을 만나야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 요양원에서 치매어르신들 대상으로 인지프로그램 강사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바쁜 연구실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버티게 해 준 시간이 바로 토요일이었다. 

토요일만 되면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음에 설레고 행복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고. 어르신들 한분 한 분을 알아가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똥손인 내가 이 인지 프로그램 봉사를 위해 색종이 접기도 틈날 때마다 연습하고, 점토 만들기도 하고 뭣보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하려고 배워둔 구연동화자격증이 이리 쓰이게 됐으니 뭐든 배워두면 다 써먹을 수 있음이 증명된 셈이다. 프로그램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우리 집에서 한 시간 거리라 토요일 오전을 나의 오티움으로 시간을 다 쓴 셈이다. 아이들은 토요일마다 엄마가 오전에 집을 비우니 볼멘소리들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뚝뚝했던 어르신의 표정이 한주 한주 변해 감을 확인했고, 요양원에 입소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사탕 하나 건넨 적 없다던 어르신이 내가 갈 때마다 내 손에 초콜릿이며, 두유를 쥐어 주시기도 했다. 


인지 프로그램 마지막 시간 아쉬운 맘에 어르신들께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컬러링책을 한 권씩 선물로 드렸다. 그중 제일 마지막에 있던 민들레 꽃, 내가 좋아하는 꽃이자 꽃말이 행복, 감사함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며 2023년 올 한 해 가장 감사한 것 두 개씩 써보자고 했다. 그러자 한 어르신이 내 이름을 쓰셨다. " 어르신 제 이름 말고 어르신이 가장 감사했던 거  써 보세요 라는 내 말에



 " 난 선생님 만난 게 제일 감사해 "라고 고백하시던 어르신.  나의 오티움으로 시작한 이 일조차, 내 이 길의 소명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 된 셈이다. 


2024년 1월 나는 미국에 왔다. 남편 안식년 때문에 따라오게 된 이 시간들 그저 여행이나 다니며 편하게 쉼을 가질 수도 있지만 난 이곳에서도 자원봉사를 택했다. 그렇게 나는 이곳 로리엔이란 곳에서 매주 2회 인지프로그램 봉사도 하고,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의 모든 상황 속 선택의 기준과, 걷고 있던 이 길이 오롯이 내 꿈을 위한 길이 되어 주고 있음을, 어쩌면 그래서 이 모든 게 나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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