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새벽 1시, 간호사실 안에서 앰플 따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온 세상이 조용하다.
나는 차팅을 막 끝내고 라운딩을 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혹시나 환자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얼른 전화를 받아 들었다.
"친절하겠습니다. 5 병동 치.." 내 전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단 듯이 " 응급실인데요. 김 XX 님 오셨는데 바로 올려도 될까요?"라고 한다. 매번 응급실은 이런 식이다. "김 XX 님이라고 다를까요? 과장님께 노티 했어요? 오더 다 받으셨어요? 입원 검사는 다 하고 올리기로 한 거 아닌가요?"라는 내 말에 "선생님~ 우리 지금 너무 바빠요. 좀 봐주세요."라며 짜증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로 볼맨 소리를 한다. 나는 순간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겨우 참고"10분 있다 올리세요." 하고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것들이 매번~ 누구는 응급실에서 일 안 해 봤나.." 하고는, 환의랑 린넨을 챙기자 안쪽에서 주사챙기던 후배가 뛰어나와 "선생님 bed making은 제가 할게요~"하고는 내게서 린넨들을
받아갔다.
<번외- 이곳 병원 내과병동에 입사한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병원 응급실은 응급센터가 아니어서 내가 근무했던 병원의 응급실보다 환자수도 많지 않았고, 케이스도 그리 중증 환자는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응급실에선 매번 바쁘다, 힘들다 호소하며 응급실에서 처치해야 할 것들까지 무조건 입원 케이스면 일단 병실로 올려 보내는걸 루틴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나이트 근무 시엔 병동도 인력이 없긴 매 한 가지였다.( 우리병동은 내과 66병상 + sub ICU 6병상 총 72병상에 거의 풀 이었는데, 나이트 근무는 달랑 간호사 두명이 일을 했었다 -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인력이다.)
언젠가는 응급실에서 DI (drug intoxication , 약물중독) 환자를 위세척도 안 하고 병동으로 올려 보낸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가 근무중이었는데 한바탕 응급실을 뒤집어 났었다. 그것 때문에
다음날 응급실 수선생님과 우리 병동 수선생님이 제대로 불꽃 튀는 전쟁을 했었다.
당연히, 우리 병동 수 샘이 이겼다.
그래서 그뒤로는 무조건 응급실에서 기본적인건 처치하고 병동으로 올리기로 합의를 봤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원위치가 된 셈이다. >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은지 3분이나 지났으려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환자분 올라오셨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난 한마디 할 요량으로 스테이션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김 할아버지가 식은땀 흘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로 1인실로 안내하고 어르신 산소부터 연결했다. 함께 따라온 보호자분들은 날 보며 " 다행히 선생님이 계셨네요. 아버지 치와와선생님이세요." 하며 할아버지 귀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날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셨다.
김 할아버지는 폐암 말기 환자였다. 3개월 전부터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입퇴원을 반복하실 만큼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
1년 전 김할아버지가 우리 병동에 처음 입원하셨을 때, 2~3시간 간격으로 보호자분이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모시고 나갔다 오셨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님이 살금살금 내 눈치를 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병실로 후다닥 들어가시길래 따라 들어갔더니 급하게 환자 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 냄새가.... 매번 보호자분들이 할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담배 한 모금을 피게 하기 위해 옥상으로 모시고 나갔다 오는 것이었다. 폐암 환자에게 담배는 독약이다. 아니 바로 죽음과 직결인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호자분들이 말리는 게 아니라 돕고 있었다는 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린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호흡하게 해 드리려고 습도도 맞추고, 시간마다 네블라이져 및 치료제를 챙겼드렸는데 배신감 마저 들었다. 나는 서랍장 및 옷장을 다 뒤져 모든 담배를 다 찾아내서 압수했다. 그때 최할아버지는 강력하게 나오셨다. " 내 목숨인데 내 맘이지. 아가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이리 내놔. 내 담배." " 할아버지 못 드려요. 이거 피실 거면 퇴원하세요. 여기 제가 있는 한은 앞으로 절때 담배 못 피워요. " 그러자 며느님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하며 날 방밖으로 내 보내며 " 선생님, 우리가 이야기 안 해봤겠어요.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선생님도 그냥 눈감아 주세요." 하셨다. 난 절때 그럴 수 없었다. 그 뒤 난 수시로 어르신이 휠체어 타고 나가려고 하면 보호자분 및 어르신 호주머니를 확인하고, 담배들을 계속 찾아 압수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김 할아버지 병실에서 응급벨 호출이 왔다. 뛰어가서 확인하니 산소 중이신데도 호흡이 거칠고 제대로 숨을 뱉지 못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담당 과장님을 호출하고 어르신 머리쪽 침상을 올리는데.. 침상옆에서 담배 한 개비가 툭 떨어졌다. 그날 어르신은 거의 죽음직전까지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다.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시곤 첫 마디가 담배 달라는 요구였다.
그날, 난 어르신과 한참을 대치했다.
어르신은 너무 흥분한 채 내 뺨을 때리셨다. 함께 있던 보호자분들도, 담당의도, 다른 간호사도 모두 그대로 얼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어르신은 두 번 다시 담배를 찾지 않으셨고, 내 말이라면 무조건 잘 들으셨다.
사실 그날, 내 뺨을 때리던 어르신 손은 심하게 흔들리셨고 맞은 나 보다도 당신이 더 당황스러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