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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Feb 23. 2024

햇살의 맛을 안다면 당신도 파리지앵입니다

  파리의 가을도 우리나라의 가을과 다르지 않았다. 반팔을 입으면 간단한 바람막이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 정도의 기온이어서 나는 가벼운 재킷을 입고 다녔다. 파리에 도착해서 삼일쯤 지났나? 유난히도 하늘이 파란 날, 센 강을 따라 걸으며 파리를 즐겼다. 그날 유독 강가에, 잔디에, 바위 위에 사람들이 마구 누워 있었다. 남자들은 상의를 벗어던졌고, 여자들 중에서도 탑을 입고 눕거나,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여름 지난 지가 언젠데. 풍경은 멋졌지만 이 날씨에 저러고들 싶을까도 싶었다. 겉멋 든 허세덩어리들. 쳇.


핀터레스트에서 퍼옴

  센 강을 끼고 걷는 길은 눈에 보이는 모든 풍광이 멋진 영화장면 같았다. 마레 지구엔 더 예쁜 가게들이 많았고, 정말 어딜 어떻게 봐도 안 예쁜 데가 없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을 사고,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들도 좀 고르면서 다녔다. 건장한 흑인 한 명이 길에 좌판을 펼치고 기념품을 팔길래, 거기서도 마그넷이랑 열쇠고리 같은 것들을 몇 개 골라 흥정을 했다. 기분 좋게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동전들이 귀찮게 쨍그랑거렸다. 화폐단위가 익숙지 않아서 자꾸 지폐로 계산하니까 동전만 많아졌다.


  동전으로 계산을 하고 싶었다. "좀만 더 깎아줘. 난 한국에서 왔다고. 네가 판 물건이 한국까지 가는 거야." 했더니 "내가 판 물건은 세계 어디든 가."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동전들을 그 흑인의 커다란 손바닥에 쏟아부으며 "이걸 다 줄게." 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더니, 안되는데 해주겠다는 뜨뜻미지근하면서도 쿨한 태도로 오케이라고 했다. 나는 "멕시, 멕시" 하며 엄청 고마워했다. 깎아준 것도 고마웠고, 동전을 해결한 것도 기뻤다. 동전을 비워내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아모리노, 이미지는 핀터레스트에서 퍼옴

  기분이 좋아서인지 예쁜 젤라토 가게가 눈에 띄었다. 빨갛고 노란 젤라토를 장미처럼 콘에 얹어 내밀었다. 10유로 지폐를 내고 7.5유로를 돌려받았다. 5유로 1개, 1유로 2개, 50유로 센트 1개. 갑자기 아까 흑인 손 위에 쏟던 동전들이 떠올랐다. 커다란 5유로짜리 동전이 네다섯 개는 있었던 것 같다. 거기다 2유로, 1유로, 50유로 센트 동전들을 다 합치면 적어도 35유로는 됐을 것 같았다. 깎아서 25유로어치 정도를 사고  거기서 더 깎아달라면서 더 많은 돈을 손바닥에 쏟아주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던 거다.


  갑자기 덜덜 떨렸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호들갑을 떨었던 수치심이 사정없이 밀려왔다. 그 와중에도 쫀쫀한 젤라토는 맛있었지만,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원래 받을 금액보다 더 많이 받은 걸 알까? 당연히 알겠지? 인정은 할까? 아니라고 하겠지?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주긴 할까? 안 돌려주면 포기해야 하나? 한심스럽고 바보 같았던 내 행동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냥 가지 말까 싶기도 했는데, 계산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더 바보가 되러 가는 길인걸 그땐 몰랐다.


  흑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헤이, 나 기억해?" "글쎄." "내가 아까 이것들을 샀잖아." 봉지에 든 물건들을 보여줬다. 그는 흘깃 보며 왜 왔냐고 물었다. "아까 이걸 사면서 내가 너무 많은 돈을 준 것 같아." "그건 네가 준 거야. 난 받았을 뿐이고." "응 맞아, 그렇지만 내가 프랑스돈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생각해 보니까 너무 많이 준 것 같아. 거스름돈을 받아야 해." "너는 나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했잖아. 나는 너의 부탁을 들어줬어."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정말 아까도 그랬지만 맞는 말만 따박따박한다.


  "이미 끝난 거래야. 돌아가." 그래도 계속 질척대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무서워서 기가 꺾였다. "너는 프랑스 돈에 익숙하잖아. 너무 많이 받은 걸 너도 알잖아." 동정에 호소해 봐도 그는 내가 주는 돈을 받았을 뿐이고만 했다. "그렇다면 이거라도 가져갈래." 하며 컵받침대를 하나를 골라 집어 들었다. "그건 안돼. 이걸 가져가." 에펠탑이 그려진 네모난 코르크 컵받침이었다. 뒷면에는 2유로라고 거침없이 쓰여있다. 가격표시하려고 세워두던 샘플을 줬다. 10유로 대신 받은 그 받침대는 내 책장에 아직도 세워져 있다.  


  파리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면서 파리 여행을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누군가는 파리가 너무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너무 별로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기준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도착했을 때의 날씨다. 파리에서 한 사나흘 머무는 사람들은 그들이 도착했을 때 날씨가 흐리면 모두 파리는 별로라고 했고, 새파란 하늘에 담긴 파리를 첫인상으로 마주한 이들은 백이면 백 모두 파리가 너무 좋다고 했다. 흐린 파리는 한없이 우울하고, 파란 파리는 영화보다 선명하다.   


  나도 거의 여행이 끝날 무렵에 어디론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상으로 올라온 구간에서 갑자기 경로를 바꿨다. 이렇게 해가 좋은 날은 반드시 야외에서 해를 쫴야 한다는 생각을 떼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어디로 가려고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로뎅미술관으로 바꿨다. 로뎅 미술관은 야외 정원에서 로뎅의 작품들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나는 몽파르나스 타워 꼭대기로 갔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 해와 가장 가까운 그곳에서 나는 바닥에 눕고 싶다는 충동을 몇 번이나 간신히 참았다.


  그제야 나는 이해가 됐다. 왜들 그렇게 밖에 나와 옷을 다 벗어젖히고 누워들 있는 건지. 파리에 살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런 곳에 살아보지 않아서 인간도 적정한 만큼 해를 쫴야 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여행을 한 3일 정도 남겨두고  나도 모르게 파리에 녹아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생각이 참 소중하게 와닿았다. 누군가 내 이마에 빠리지엔느 도장을 찍어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 달이면 유럽 몇 나라를 돌 수도 있지만, 이렇게 머무르는 여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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