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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Feb 26. 2024

어바웃 오만과 포장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다.

사실 미덕이라기보다는 필수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소서로 자신의 능력을 포장하고 이리저리 꾸미곤 한다.

이제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화장을 하며 자신의 맨 얼굴보다 더 예쁜/잘생긴 얼굴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원래 체형보다 더 다리가 길어 보이고 날씬해 보이는 코디는 어느새 입소문을 타기도 하고,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보면 정말로 맛있는 음식점에 가기보다는 스토리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세련된 인테리어거나 소위 힙한 장소가 인기를 끈다.

모두 포장의 일부다.

그런데 과연 이 포장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옛날에 읽었던 책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의 일부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글을 쓰게 되었다.


"확실히 조잡스럽기는 하지만 소박한 흉노의 풍속이 아름다운 명분 아래 숨겨진 한인의 음험함보다 훨씬 호감이 갈 적이 많았다. 이능은 제하의 풍속을 옳은 것으로, 흉노의 풍속을 천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한인적인 편견이 아닌가 하고,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인간에게는 이름 외에 '자'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유도 모른 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인들이 말하는 예의란 무엇인가? 추한 것을 표면만 아름답게 꾸미는 허식이 아닌가? 실리를 추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은 한인과 호인 중 어느 쪽이 더 심한가? 색에 빠지고 재물을 탐하는 것 또한 어느 쪽인가?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필경 어느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한인은 이것을 위장할 줄 알고,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포장의 오만에 대하여


사람들은 많은 순간 포장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비단 외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학교에서/직장에서/친구 관계에서 한 마디 따끔하게 말해 주고 싶은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참곤 한다. 나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서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서로 '예의'라는 가면을 쓴 채,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에게 오늘 하루 자신을 힘들게 했던 존재들에 대한 불평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포장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째보면 색깔도 향기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포장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문제는 포장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한 자신으로 받아들였을 때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얼보다는 관리를 받고, 화장한 얼굴이 더 화사하고 나을 것이다. 당연하다! 자신의 얼굴에 있는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포장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포장을 잘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과 거부감 없이 어울릴 가능성이 높고, 그렇기게 포장은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스킬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자신을 꾸미는 일에서 얼굴에 무언가를 입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걷어내는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 화장을 지우지 않거나, 제대로 닦아내지 않는다면 우리 몸과 피부에는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날씬한 다리로 보이기 위해 압박 스타킹을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 우리 다리에는 무리가 간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포장할 수는 없다. 걷어내는 시간, 조금 덜 세련되고 멋지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볼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날것의 오만에 대하여

위에서 보았던 말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

"한인들이 말하는 예의란 무엇인가? 추한 것을 표면만 아름답게 꾸미는 허식이 아닌가? 실리를 추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은 한인과 호인 중 어느 쪽이 더 심한가? 색에 빠지고 재물을 탐하는 것 또한 어느 쪽인가?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필경 어느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한인은 이것을 위장할 줄 알고,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면 필경 어느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는 문장이다.

물론 맞다! 고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내면은 크게 다를까? 누구나 마음껏 먹고, 소리지르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차이는 얼마나 조절하고 절제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결국 내면은 같으면서, 외면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족이 흉노를 무시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일 것이다. 나의 외면이 좀 더 나아 보인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기 떄문이다.

하지만 한 번 꼬아서 생각해보고 싶다. "단지 한인은 이것을 위장할 줄 알고,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앞서 말한 고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내면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용모는 상당히 다르다.

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고 수련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만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서로의 어두운 면은 비슷하다며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것은 또한 정당한가?

말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이런 말들을 모두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기반해 흉노의 생각에 반박을 제시하고 싶다. 그들의 내면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포장하고자 했던 행동이 자신의 습관이 되고 생각이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포장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만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할까, 단순히 취업과 인스타용 사진 건지기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형태와 향기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체취를 덮어 주고, 조금 포장해 주는 것이 낯섦과 불편함의 장벽을 낮추게끔 하는 하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고사 그대로의 내용은 아니지만, 문장을 읽으며 내가 느낀 바를 정리해 보았다.

나는 자신을 지나치게 포장하는 것도, 혹은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것도 하나의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포장하며, 포장된 모습만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오만이 있다. 자신의 결점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만을 강조하며 자신을 포장할 노력을 하지 않는 오만이 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 나를 적당히 포장할 줄 알고 또 깨끗이 덜어낼 줄도 아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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