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충분하다(5)-2합 2/2

by 향다월



"왜 너랑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가 닫혀있는 사람이 되는 건데? 나는 관념 철학보다 실전 철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결국 사람 사는 일에 관한 게 철학이기 때문에 자폐적인 사유를 집착하는 건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인터넷 서핑을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야. 너는 철학적인 숭고함을 빌미로 처세술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있어. 니가 주장하는 가치들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참여자들 모두 기분 안 나쁘게 대화할 수 있어. 실력 문제란 말이야. 방침 문제가 아니라. 니가 좋아하는 플라톤의 향연도 그런 종류의 대화 구성 아니었어? 너는 고대의 철학자들도 지키는 규칙을 왜 거슬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너는 내가 너를 속단한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나를 속단하잖아.


내가 저번에 어떤 영화를 볼지 결정하는 신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 우리는 영화동아리 사람들이야. 어떤 영화가 훌륭하고, 그 위상이 어떤 지 쉽게 정보를 종합할 수 있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OTT 스크롤을 내리면서 볼 영화를 찾지 않아. 그저 자체적으로 모은 아카이브 같은 리스트에서 끌리는 영화를 보는 거야. 나는 여기서 '연'을 접목하면서 내 철학을 읊었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처럼, 사람과 작품이 만나는 연이 있다, 이는 정보의 부재도, 체력의 부족도, 취향의 다름도 원인이 되지만, 사실 거대한 난수에 지배받는다고. 나는 그래서 유명하고 좋은 영화여도 안 본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해 책임감은 느끼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지. 너는 이런 나를 운명론자 취급했잖아! 내 나름대로 찾은 아름다운 관점을 나태한 운명론으로 격하하고, 자기는 감독 필모그래피를 하나하나 다 완주하는 깨어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있어. 너는 영화를 좋아하는 거냐, 영화를 좋아하는 자신을 좋아하는 거냐? 너야말로 무비판적인 관객이야. 어떤 감독이 대단하니까, 그 감독을 완전히 이해한 척 젠체하고 싶으니까 그 감독의 모든 작품들을 보려고 발악하는 거잖아! 나는 적어도 시놉시스를 읽고 그 영화를 볼 지 말 지 판단해. 감독의 네임 밸류나 평점 같은 거시성에 지배당하진 않아. 내 취향 이외에 어떠한 선택 제약도 없다고.


그리고 너는 타인을 알아가는 노력이 마냥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러면서 다른 사람 상처 입히는 거는 생각 안 하냐? 둘이 같이 지하철 타고 집에 갈 때, 동아리 여자애랑 톡한 기록이 뜨니까, 자기 폰인 것마냥 클릭해서 대화 내용을 확인했잖아. 이것도 니가 말한 노력이냐? 관음증 아니야? 그러면서 타인이 너를 알아가려 할 때는 어물쩍 대답한 적 많잖아. 그게 단순히 귀찮았던 게 아니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