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정확히 그리스를 떠나는 날은 다음날이지만 그날은 껌껌한 새벽에 체크아웃한 뒤 내내 비행기와 공항 안에 있어야 했다. 그러니 하니아 시내의 아침 풍경은 이때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멍하니 베란다에 서서 도로를 오가는 차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날은 각자 시내를 돌아보는 모노스데이였는데, 마지막날을 모노스로 보내기는 아쉽다는 도아의 의견에 따라 오전에 근교의 호수에 다녀와서 오후에 시내를 나가기로 했다.
구글 맵에서 호수 근처 식당을 예약해놓고 찾아갔는데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의아해하며 기웃거리고 있을 때 안쪽에서 사장님이 나와서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도 사장님도 영어가 짧아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구글 맵에 예약이 잘못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내 예약 내역을 보고는 사장님도 당황했고 나도 나 나름대로 당황했다. 오전 중에 여는 식당은 몇 개 있지도 않고(여기가 아침부터 여는 곳이라 예약한 거였다), 심지어 여기는 시내가 아니라 식당 자체가 별로 없는 숲 속의 작은 마을이었다. 다른 식당을 빨리 찾아봐야 하나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제스처로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영업을 하지 않는데 우리를 예외로 받아준 것 같았다.
이 호수 뷰가 유명한 곳.
원칙적으로는 영업을 안 하던 때여서 정말이지 아-무도 없이 완전히 전세 내고 앉을 수 있었다.
여기 스위스 맞다 맞아 (아님)
저 너머로는 바다도 조금 보인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프레도 커피를 다시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우유에서 희한하게 비린 맛이 났다. 너무 대놓고 비린 맛이라 상한 것 같지는 않았고 원래 이런 우유인 듯한 느낌… 물어봐도 영어가 서로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오징어튀김과 새우, 문어, 홍합을 곁들인 해산물 세트. 오징어튀김이 정말 맛있었다.
이날은 좀 쌀쌀해서 물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하필 이곳에서 무료로 생수를 제공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물을. 황당하지만 이런 것도 여행의 맛.
피자인 줄 알았던 오믈렛.
디저트까지 클리어!
봐도봐도 그림 같은 풍경을 액자에 담아두고 떠났다.
저기 조그맣게 보이는 오리배를 타러!
호수로 가는 길에 기념품 가게도 늘어서 있었다.
초록초록하고 파랑파랑해서 마음이 트였다.
이 알록달록한 배를 타는 게 오늘의 미션.
그리스의 얼렁뚱땅 시스템은 여기서도 겪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오리배를 빌려주는 파라솔이 있어서 거기서 돈을 내고 입장했는데, 그 길은 완전히 트여 있어서 그냥 아무나 다 지나다녔다. 그런데 들어가자 직원이 오리배를 빌렸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영수증이라든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보고 왜 돈 받고 빌려주는 거지? K-효율러는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하여튼 호수는 아름다웠고 우리는 오리배를 탔다.
3인용이었는데 페달 밟는 자리는 2인용이라 한 명은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어쩐지 당연하게 내가 뒷자리에 배정됐고… 도아의 캠코더로 촬영을 좀 하고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큰 호수가 아닌데도 시야마다 다르게 보였다. 그리스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에 하나였고, 이곳에 온 건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늦었지만 도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툰의 선글라스를 거울 삼아 셀카를 찍기도 했다.
도아와 교대 타임. 확실히 툰과 도아가 굴릴 때보다… 배가 가는 건가? 하는 속도로 굴러갔다.
그저 내가 페달을 굴려봤다… 라는 의의만 있던 정도.
도아는 뒤에서 그림을 그렸다. 왼손잡이 감성쟁이.
이 호수에서의 또다른 미션은 거북이를 찾는 것이었다. 이 호수의 구글 리뷰에는 거북이를 본 사람들의 후기가 가득해서 우리도 어느 정도 풍경을 즐긴 뒤에는 본격적으로 거북이를 찾아 나섰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다가 유난히 배가 몰려 있는 곳에 갔더니 역시 거기가 핫플이었다.
처음 봤을 때 정말 소리를 질렀다. 거북이가 이렇게 귀여운 줄 처음 알았다.
뻐끔 하고 고개를 내미는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우리 뒤에도 거북이를 보러 몰려든 오리배들이 있어서 적당히 보고 돌아왔다.
서로 단독 사진까지 찍어주고 알차게 놀았다.
그리고 물가를 나오려는데 세상에 저 오리배들 틈에서 백조 떼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어쩜 이런 동화 같은 풍경이.
옹기종기 모여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낡고 지친 인간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모노스 타임이 시작돼서 각자 쉬다가 저녁 식사 때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아가 먼저 나간 뒤에 나는 조금 더 뒹굴거리고 있었다. 툰이 잠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툰이 나 간다! 열쇠 챙겨! 하고 외출을 알려왔다.
여러 사건으로 열쇠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던 나는 절대 열쇠 담당자가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제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빌면서 미친 듯이 나갈 준비를 했다. 다 있던 짐이 그때부터 갑자기 안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일까. 운동화를 신고 나가려고 했더니 운동화도 안 보이고 겨우 신고 나오니 유로를 두고 나오고… 욕을 아주 맛있게 얻어먹었다. 그래도 덕분에 열쇠는 툰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었다.
이날 모노스의 이벤트는 도아가 급제안한 미니 게임. 시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젤라또를 사준다고 해서 시작된 게임이었다. 이런 건 또 질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단단히 나섰다.
그리고 나는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도아에게 찍혔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짜 시내에 막 도착해서 어디로 가지 찾아보던 중에…
이후에 생긴 일. 웹진에 소설 한 편을 발표하게 됐는데 거기에 낼 사진이 마땅치 않아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리스에서 사진을 오백 장은 찍었으니(아님) 그중에 뭐라도 건질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름 사진 후보를 추려 소설 모임에서 골라달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모두 컷하셨다. 작가의 사진은 뒷모습도 안 되고, 정면을 봐도 안 되고, 얼굴이 보이되 살짝 고개를 숙인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 내 인상이 좀 세서 더 그렇다는 거였다.
결론적으로는 황당하게도 그리스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에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진이 이때 찍힌 이 사진뿐이었다. 게임에 패배해서 찍힌 증거물을 작가 사진으로 싣게 되었다.
분해서 도아의 뒷모습이라도 찍었다.
킹받아…
하지만 이때부터 하니아와 본격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에요.
이때까지는 나에게 그리스 최애 도시였지만 이날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세계에서 최애 도시가 되어버렸다.
골목골목이 어쩜 이렇게 예쁜지 아무리 찍어도 카메라에 그 예쁨이 담기지 않아 휴대폰을 부술 뻔했다.
항구도시라는 것도 매력적이고.
날씨는 흐린데도 마냥 좋았다.
낡은 건물 위로 보이는 하늘의 조화는 또 어찌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리고 여기서 또 도아에게 찍혔다. (체념)
도아는 툰의 사진까지 찍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gps를 달아놓고 그 게임을 제안한 게 틀림없다.
여기서 서로 사진이나 찍어주고 헤어졌다.
톨킨 소설에 나오는 그 집 문 아니냐고요.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님)
마지막날이라 살 것도 많은데 시내는 너무 예뻐서 구경도 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그런데 사진에는 이 실물이 담기지가 않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이 시내 구경만으로도 일주일은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휴대폰 배경화면. 이 화면을 보면 지금도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동행인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제법 호쾌한 걸음으로 가는 중.
항구의 바로 앞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다. 전날 갔던 The Five Restaurant과도 가까운 거리.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도아가 선물이야, 하면서 봉투 하나를 건넸다. 마그넷이나 엽서 같은 건 다 주고받아서 이제 더 줄 게 없는데 뭐지 했는데 세상에.
에코백이었다.
낙소스를 떠날 때 이후로 잊고 지냈던 존재였는데…
내가 납작복숭아를 찾아다녔던 것처럼, 그게 내 미션이었던 것처럼 도아에게는 내 에코백을 구하는 게 미션이어서 이걸 찾아다녔던 것이다.
내가 납작복숭아를 찾는 마음과 도아가 에코백을 찾는 마음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나는 납작복숭아를 찾는 데 나만의 재미를 붙인 정도였으므로. 나와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그날을 생각하고 있었냐고 묻지는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고 대답했으면 나는 뭐라고 말할지 알 수 없었을 테다.
이 에코백은 한국에 돌아와 자랑하는 용으로 몇 번 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잘 들지 못했다. 닳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건 그냥 기념품은 아니니까.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식사.
위는 그릭 샐러드와는 약간 다른 크레탄 샐러드고 아래는 stuffed zucchini flower라고 해서 호박꽃잎에 쌀이나 고기 같은 재료를 감싸 먹는 에피타이저다. 후자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둘 다 크레타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한 번쯤 먹어보는 것도 추천.
문어와 수블라키까지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나는 무료 디저트로 내어주는 이 브라우니가 너무 맛있었다… 진짜 천상의 맛.
브라우니 맛집이었어.
식사하면서 우리는 여행에서 가장 맛있었던 식당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골라보았다. 그때 왜 좋았는지, 왜 행복했는지 설명하다 보니 그건 모두 서로가 옆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이 여행에서도 모노스를 마음껏 즐겼지만 여행이 모두 끝난 뒤 확실한 건 한 가지다. 이때 나에게 이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것.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저녁이 환상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또 사진 오백만 장 찍고 캠코더도 찍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서 너희 찍어줄까, 를 시전하셨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행복을 함께해준 그리스 사람들 영영 잊지 못할 거야.
식사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석양은 못 보겠구나, 했는데 뜻밖에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그래서 주변이 더 어두워져가는 걸 보면서 어쩐지 슬프기도 했다. 이 풍경이 정말로 이 여행의 막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한 장이라도 더 찍겠다는 자의 발악…
티나지는 않지만 에코백이 더 잘 보이게 맨 모습이다.
점점 완연한 밤.
미니게임에서 패배한 나와 툰이 도아에게 젤라또를 사줘야 해서 시내로 다시 돌아갔다.
간 김에 나와 툰이 핸드크림을 더 사고 싶어서 전에 봐두었던 가게로 들어갔는데, 그곳의 사장님이 스몰토크로 나에게 툰이 남편이냐고 물었다. 우웨에엑 하면서 오우 노우!!!!! 하고 외치자 그럼 친구냐고 물어서 으음? 음 그것도… 그냥… 그는 내 운전 기사야! 대답하자 툰은 매우 빡치고 사장님은 빵터지셨다. 뭐 그 뒤로도 아무말 했더니 사장님은 그런 게 상당히 마음에 드셨는지 결제할 때 갑자기 손짓을 하더니 잔을 꺼내서 술을 따라주셨다. 화장품 가게에서 술이요? 지중해 나라의 멋짐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
나도 툰도 술을 못 마신다고 하자 사장님은 매우 의아해했다. 아무래도 서양인들은 성인이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나는 건강문제라고 말했지만 툰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하기 애매해서 그냥… 그는 남자도 아니야! 라고 대답하자 또 빡치고 또 빵터지고. 사장님께 아주 큰 웃음 드리며 렛츠 고 드라이버! 하고 가게를 나왔다.
다른 가게로도 갔더니 거기서 툰은 작은 핸드크림을 여러 개 샀는데 거기 사장님은 또 음흉하게 웃으면서 여자친구가 상당히 많은가본데, 하고 놀렸다. 핸드크림의 바코드를 하나씩 찍으면서 이건 안나~ 이건 마리아~ 하는데 웃겨 죽는 줄.
이렇게 사고 나왔더니 이번에는 도아가 악세사리 가게에서 목걸이를 착용해보고 있었다. 각자 제법 멋진 쇼핑을 하고 있었구나. 하나를 결제해서 나온 도아와 젤라또를 하나씩 골랐다.
그런데 아마도 공금으로 결제한 듯. 게임은 왜 한 거야 (황당)
내가 혼자 큰 사이즈를 먹은 게 아니라 의사 소통에 오류가 있어서 싱글 사이즈를 더블 컵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나의 초콜릿도 맛있었지만 툰이 먹은 소다맛이 아주 맛있었다.
성당 앞의 영업을 종료한 야외 카페에 앉아 먹었다. 밤이 깊어 평화롭고 고요했다. 이 사진을 보면 젤라또의 맛보다 그때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몇 시간 뒤면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밀어두고 이 밤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있던 순간.
툰이 도아가 산 목걸이에 영업 당해서 그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툰이 여자친구와 자신의 목걸이를 고르고 도아가 추천을 해주는데 정말 직원인 줄 알았다. 옷도 시크한 올블랙으로 입어서 그냥 티셔츠를 입은 진짜 직원보다 더 직원으로 보였다. 여러 개를 채워줬다가 풀어줬다가 하는 게 아주 여기서 수수료 받는 프로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하나를 추천해줬다. 그런데 그 목걸이는 9유로였고, 나는 트레블월렛 카드에 남은 잔액이 9유로는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니 도아가 자신은 어차피 이제 돈 쓸 일이 없다며 잔액 2유로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정도면 결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 해봤더니 실패했다. 그러자 툰이 그럼 5유로를 보내줄 테니 다시 해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카드에 2유로도 없지는 않았을 거라며 여긴 아마 트레블월렛 카드가 안 되는 곳인 것 같다고 했다. 하필 도아가 현금으로 결제를 했다는 게 그 믿음에 근거를 더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기어이 툰이 5유로를 보내줘서 결제를 다시 해보자 결제가 되는… 해피엔딩이자 수치엔딩. 목걸이 받자마자 바로 두 사람에게 90도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거듭 사죄를 하고 직원은 뒤에서 웃고 난리났다. 이렇게 내 돈 2유로, 도아의 돈 2유로, 툰의 돈 5유로를 들여서 나의 지분은 20% 정도로 목걸이를 획득하게 되었다.
나는 귀도 뚫지 않았고, 반지나 팔찌나 목걸이 등 일체의 악세사리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별 이유는 없고 귀찮아서. 하지만 이 목걸이는 생각나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친구가 나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준 물건이고, 잔액이 모자랄 것 같다고 포기하는데도 두 사람이 돈을 모아 나에게 사준 것과 다름없는 귀한 선물이고, 자주 할수록 그때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기념품이니까.
집 앞의 카페에서 디저트와 음료까지 사서 돌아왔다.
여행의 마지막날을 정말로 꽉 채워서 보냈다.
도아의 목걸이와 나의 목걸이.
날이 따뜻해지면 더 열심히 하고 다녀야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피스타치오와 체리 디저트인 것 같다. 어쩐지 지옥에서 온 듯한 비주얼. 맛있었는데.
디저트를 먹고 음료를 마시면서 도아가 영수증 정리하는 걸 구경했고 사진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고난의 짐싸기… 각종 마그넷을 온갖 옷에 돌돌 감싸서 완충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잠에 빠지는 그때 잠깐 스쳤던 생각은 이런 거였다. 이제 여행은 끝났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병을 진단받은 뒤 일 년이 넘도록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앞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지금도 매일 약을 먹지만 그러면서 이 여행기를 쓴다. 소설도 쓰고, 일기도 쓰고, 영화의 리뷰도 쓴다. 이따금 곰곰이 나는 언제부터 다시 살게 됐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 활기차고 소란스러웠던 하니아의 골목길에서부터가 아니었나, 하고 휴대폰 배경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때의 풍경이 나에게 자전거 굴러가는 소리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