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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른 방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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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Nov 25. 2023

다른 방 3

유월 말의 이사 날에는 짐이 많지 않았는데도 정리가 마무리되자 자정이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누운 소희에게 연호가 제안했다.

소희야, 우리 산책할래?

산책? 안 피곤해?

나 산책로가 있는 아파트에 살아 보는 거 처음이야.

대체로 침착하고 무던한 연호가 가끔 들떠서 뭔가를 해 보자고 할 때 소희는 대부분 거절하지 못했다. 그들은 카디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차림으로 산책로를 조금 걸었다. 산책로는 생각보다 어두웠고 사람이 없어서 을씨년스러웠다. 십 분 정도 걷다가 돌아온 그들은 단지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이제 우리 여기 주민이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연호가 중얼거렸다. 소희는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섯 번도 넘게 와 본 집인데 그 순간에는 기분이 묘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에는 설레기까지 했다. 신발을 벗은 뒤 화장실과 현관 맞은편 방을 등지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그들은 집을 구경하러 온 손님처럼 새삼스럽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 집의 매력 포인트는 요즘은 다 없애는 체리 몰딩을 그대로 살린 부분이었다. 두껍고 색 진한 몰딩이 거실 천장의 샹들리에, 진한 고동색 마룻바닥과 어우러져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냈다. 자줏빛 소파와 이젤에 거치한 46인치 텔레비전이 거실의 포인트가 되었고 주방의 6인용 원목 테이블이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안방에는 페르시안 문양의 극세사 러그를 깔고 원목 침대 헤드에는 은은한 간접 조명을 달았다. 침대의 양옆에는 빈티지 협탁을, 맞은편에는 각종 오브제를 진열한 장식장을 배치했다. 옷방 겸 서재로 쓸 작은 방에는 붙박이장 앞에 책장과 컴퓨터 책상을 넣고 원목 선반 위에 크고 작은 소품을 두었다. 내가 손님이라면 이 집에 정말 살고 싶을 거야. 소희는 생각했다. 연희 할머니 집의 인스타그램의 계정에 들어가 보자 마지막 피드에 영업 종료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이사한 뒤 한동안은 인기 많은 숙소에 여행 온 기분을 느끼며 지냈다. 때때로 보이는 풍경마다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하얀 이불 시트와 격자무늬 창문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연호가 꽃을 사 와서 거실 테이블의 화병에 넣어 두었을 때. 배달로 시킨 음식을 그릇에 담고 원목 테이블에 플레이팅 했을 때. 

그 방이 다시 눈에 들어온 건 문고리 때문이었다. 이 집의 문고리는 체리 몰딩과 마찬가지로 요새 보기 힘든 황동색 원형 문고리였다. 작은 구 모양의 손잡이를 쥐고 손목을 써서 돌려야 열리는 방식이었는데, 지난주에는 안방에서 문고리가 저절로 잠기고 말았다. 연호가 업자를 불러오는 두 시간 동안 소희는 안방에 갇혀 있었다. 

출장 온 업자는 이런 이유로 원형 문고리는 요새 거의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쇠가 문고리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보관을 잘못해 잃어버리면 열쇠를 복사하기도 번거롭고, 한번 잠긴 문고리는 일반인이 열 수 없어서 손목이 약한 어린이나 노약자가 갇히는 일이 많았다고. 레버형 문고리는 젓가락 같은 긴 막대로도 열려서 잠기더라도 쉽게 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갈 때 원상 복구만 하면 뭘 하든 상관없댔지? 문고리 바꿔야겠다.

업자가 가고 난 이후에 연호는 바로 말했다. 소희는 으음, 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주아가 괜찮다고 했다니까. 연호가 재차 말했다.

아니, 그냥 아쉬워서.

뭐가?

저 문고리가 이 집이랑 잘 어울리니까.

레버형 문고리도 잘 어울리는 게 있을 거야.

그들은 십 분 만에 무광 금색 문고리를 골랐다. 그리고 주문 개수를 정할 때 의견이 갈렸다. 소희는 문고리를 바꾼다면 통일감을 위해서 모두 바꾸고 싶었다. 쓰지 않는 방이라도 그 방만 문고리만 다르면 두고두고 거슬릴 것 같았다. 연호는 저 방은 주아의 방이니 아무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방 문고리 바꾼다는 건 네가 주아한테 말할 거야? 그런 말까지 하면서. 소희는 주아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통일감을 위해서야. 주아는 뭐라고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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