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량의 역사라 쓰고 요요의 경험이라 읽는다. 최근에도 나름의 급격한 감량을 이루어낸 적이 있었다.
여름인가, 불볕더위에 내 일상이 모두 증발된 가운데 집과 회사만이 석출 되어 오롯한 상황이었다. 다이어트란 본디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건만, 좀처럼 잘 보이고 싶은 곳이 없는 생활 반경 탓을 하며 도망치듯 본가로 내려갔다. 설거지하는 엄마 뒤통수에 대고 요즘 회사가 바쁘고 친구네 결혼생활이 어떻고를 조잘거리는 중 대뜸 대화가 튀었다.
“니 동생 결혼식 얼마 안 남았다”
역시 어머니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위대한 존재이다. 뒤돌아서도 묵직한 비수를 정확하게 내리꽂는 이여사였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이여사에게 다이어트 중이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심으로 그것에 늘 진심이라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으며 은근하게 조력하곤 했다. 예를 들자면 아무 말 없이 내 밥만 종지그릇에 담아준다던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하다니 동생 결혼식이 새삼 대단한 이벤트이긴 하다.
"한 달 남은 건가?"
이제야 생각난 듯 태연하게 받아쳐 보지만 나 역시 오래전부터 숙제를 미루는 것처럼 마음 한편이 뻐근했다. 결혼식엔 굳이 먼 친척들마저 와 버릴 것이 뻔하지 않은가. 주인공은 신랑, 신부와 혼주겠지만 무심하게 나를 훑고 갈 시선들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상견례날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고 찍은 사진에 웬 아주머니가 있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꽤 흘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새기며 살았는데 30대가 넘어 살이 찌면 덤으로 아줌마 태를 얻게 되니 럭키비키자나! 라고 회피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급하게 5킬로 정도는 빼야 백화점 4층 기성여성복 매장의 원피스가 보기 좋게 맞을 것 같다. 물론 상견례 때만 해도 결혼식까지 10킬로 정도는 빼서 코로나 전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 다짐했었다. 언제 적 코로나인가? 이미 5년 전의 몸무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한 달간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그도 가능하면 다이어트식으로 먹었다. 다이어트식이라고 함은 닭가슴살. 샐러드, 단백질 쉐이크, 두부오이간장밥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몸속에 들어와도 아주 잠시만 존재감이 있어서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극도의 허기 속에서도 당연히 돈은 벌어야 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회사일이 힘쓰는 것보다는 낫다 싶지만 타자를 치는 와중에 집중은 되지 않고 감정은 파국으로 치닫는 날들이 연속되었다. 남이 준 자료에 난 오탈자에 괴로워하고 업무 메일이나 공지에 숨은 모순을 누구보다 빨리 찾아내는 삐딱한 시선도 얻게 되었다.
왠지 운동까지 하면 여름날 더위를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 생략했는데 그것이 패착이 되었다. 결혼식 3일 전 본가에 내려가 하객용 관광버스 간식을 마련하는데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생수 작은 것, 사이다, 귤, 비스킷, 여름이니 녹기 쉬운 초콜릿 대신 젤리, 민트맛 사탕 그리고 가스활명수를 무지의 종이백에 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덤벙거리는 성격의 나였지만 회사를 다니며 논리와 문서의 무결성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가 되었는데, 민트맛 사탕의 개수가 다른 것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바람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기진맥진하여 어디에 갖다 붙여도 그럴듯한 이 만능회의론적 문장이 튀어나와 떠나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완성된 100여 개의 종이백을 보며 희생, 친절, 배려 이런 이타적인 단어들을 넣은 주머니의 이름은 체력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동생의 결혼식날. 좀 타이트했던 원피스가 쑥 들어갔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지금, 꼭 결혼식 한 달 전 몸무게로 돌아왔다. 반전은 없었고, 석 달간 나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