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매일 하긴 힘들지 않아요?"
사람들이 묻는다. 필라테스를 주말 빼고 매일 한다고 하면 꼭 따라붙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무념무상으로 하면 돼요.“
그렇다. 아무 생각 없이, 크록스에 발을 쓱 밀어 넣고, 현관문을 열고, 필라테스원으로 걸어가는 거다.
무슨 요일인지 따지지 않고, 가기 싫은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냥 간다. 그냥 한다. 그냥 돌아온다.
하기 싫어도, 피곤해도, 일단 몸을 데려다 놓는 게 중요하다. ‘생각 없이 하다 보면 언젠가 몸이 기억하겠지.’
아이들에게도 종종 말하곤 했다.
“얘들아, 하기 싫은 일을 수록 그냥 하는 거야. 저스티 두 잇!”
김연아 선수의 말처럼.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나는 그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버티는 데엔 자신 있었다. 운동이든 인생이든. 사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일수록 일단 몸을 들이민다. 의지나 동기보다 ‘습관’이 앞서게 하는 방식. 그게 나에게는 버티는 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무념무상 철학을 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은 옆집 언니를 수업에서 마주친 날이었다. 몇 달 사이 그녀의 몸은 달라져 있었다.
어깨에서 골반까지 매끄럽게 떨어지는 라인, 다리미로 눌러놓은 것 같은 납작한 배. 나는 몰래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리 나이에 납작한 배라니! 그건 이삿짐 싸다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을 우연히 다시 찾은 수준의 경이로움이다.
“뮤뮤님, 다리를 더 들어야 해요.”
선생님의 반복된 지적에도 내 다리는 말 안 듣는 초등학생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날은 바렐 위에서 네발기기 자세를 하고, 한쪽 무릎을 접어 천장으로 올리는 동작이었다. 마치 멍멍이가 소변을 보는 듯한 자세라고나 할까. 맨땅에서는 별것 아니지만, 바렐 위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바렐 위에서 네발기기 자세를 한 것만으로도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내 근육은 바짝 경직된다. 하지만 내 긴장과는 아랑곳없이 선생님의 요구사항은 한도 끝도 없다.
허리는 꺾이지 말아야 하고, 고개도 떨어뜨리지 말고,
레더 잡은 손에 너무 기대지 말고, 엉덩이도 빠지지 말고.
몸통은 미동도 없어야 하고, 움직임은 오직 고관절에서만!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런데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했고, 옆집언니에게는 나이스를 외쳐주었다.
그녀는 정확했다. 부드러웠다. 우아했다.
마치 고관절에 윤활유라도 바른 듯한 움직임이었다.
다음 자세도 그랬다. 레더에 발을 고정하고 발레리나처럼 팔을 펼치며 상체를 돌리는 동작, 데드버그(아래 사진참조).
이렇게까지 못하는 건 아닌데 나는 계속 삐걱대었다. 자꾸 승모근에 힘을 주고, 몸통보다 팔이 먼저 나가고, 허리는 굽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익숙하게, 아름답게 돌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지구 반대편 천재보다 내 친구 아들의 성적이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다.
나는 어떤 회원의 발전보다, 옆집 언니가 갑자기 잘해진 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날,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왜 나는 제자리이지?”
답은 빨리 돌아왔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해온 거다.
하루 종일 자잘한 일과 애들로 분주하게 살다가 운동 시간이 되면 머리를 꺼버리고 몸만 움직였다.
올라가라면 올라가고, 내려오라면 내려오고. 그게 점점 쉬워졌다는 건, 이미 내가 멈춰 있었다는 뜻이었다.
특히 내게 취약한 자세는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알면서도 그냥 넘겼다. 왜 안 했냐면... 그게 너무 귀찮았던 거다. 그러니까 네발기기 자세에서 다리를 올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둔근과 복근에 힘이 들어가는 걸 음미하라니. 조금만 더 움직여 보라니. 솔직히, 그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무념무상에서 오지 않았다.
‘그냥 한다’는 건, 어떤 날의 나에게는 생존이었고, 어떤 날의 나에게는 회피였다. 때로는 버티기 위한 기술이었고, 때로는 감정을 밀어두는 핑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음’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었다.
성장은 귀찮음을 견디는데서 온다. 어쩌면 김연아 선수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진 않았을 거다. 중요한 건, 정확히 느끼고, 그걸 또 해보는 일.
그날 이후 나는 선생님들의 지적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승모근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
어깨날개뼈가 안 움직인다는 말,
오른발이 자꾸 돌아간다는 말.
그 모든 말들이, 그제야 들렸다. 어디에 힘을 주고 있는지, 어디를 쓰지 않고 있는지. 한 번 더 느끼고 바꿔보려 노력했다.
놀랍게도, 그런 부분에 집중한 지 딱 2주 만에 김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
“뮤뮤님, 지금 자세 완벽해요!”
그리고 그 주, 다른 선생님께도 연이어 자세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한 주에 세 명의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건, 성인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어쩌면 난생처음일지도)
그러니까 변화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딱 한 번 더 의식해 보는 거였다.
나는 여전히 무념무상으로 운동을 다닌다. 크록스를 신고 나가, 무심하게 걷는다.
하지만 이제는, 동작 사이에 내 다리 각도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허벅지 뒤가 당기는 느낌을 조금 더 느껴보기도 한다. 그건 아주 작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무념으로 걷더라도,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니까.
나는 오늘도 그걸 연습 중이다.
*참고
-커버사진 : 온전히필라테스 회원
-본문사진 : 아띠필라테스 선생님
-> 제 사진은 없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