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라테스하면 살 빠질 줄 알았지.-1

갱년기의 운동

by 뮤뮤

"너 살찐 거 같더라. 요즘 몇 킬로니?"

헤어진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울린 전화, 핸드폰 너머 엄마는 다짜고짜 몸무게부터 물었다. 이런 질문, 요즘 세상엔 이제 엄마들만이 할 수 있는 팩폭이다.

"음.. 59킬로쯤?"

사실은 60킬로그램. 1 킬로그램을 빼고 말했다. 앞자리 숫자 하나 차이, 그건 체감상 몸무게 10킬로의 차이니까.

"59킬로오오?"

못 들을 걸 들어버린 사람처럼, 엄마는 놀란 소리를 길게 끌었다.

"운동하는데도 자꾸 찌네. 갱년기라서 그래."

변명 같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신은 갱년기 때 오히려 빠졌다고 잘라 말했다

"더 찌면 안 되겠다."

뚝.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 평가하는 일은 우리 집안의 오랜 전통이다. 나는 눈을 한 번 껌뻑이고, 무표정으로 다시 길을 걸었다. 가족이니까 참는다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돌아보면 참 이상하다. 엄마 말대로, 당신은 갱년기에도 살이 찌지 않았다.




엄마는 원래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갱년기 즈음, 단전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엄마를 더 괴롭게 했다. 전기주전자처럼 쉭쉭, 엄마는 쉽게 끓어올랐다. 누구 하나 걸리면 제삿날이었고, 고등학생이던 나는 웬만하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거실을 지나야 할 땐, 깨금발로 움직였다.


그러다 교회 집사님과 우연히 오른 북한산에서 엄마는 깨달았나 보다. ‘아, 이게 살 길이구나.’

그날 이후, 엄마는 북한산 날다람쥐가 되었다. 원래 뭐 하나에 꽂히면 무섭도록 성실한 당신은 거의 매일 산에 올랐다. 그 덕에 식탁 위 반찬 가짓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분노 폭격을 피할 수 있다면, 그깟 반찬쯤이야.


엄마가 갱년기를 맞기 전, 내가 열 살 쯤이었을까. 온 가족이 처음 등산을 간 날. 그땐 아빠가 한창 산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엄마가 산에 빠졌을 때는 아빠가 이미 흥미를 잃은 후였다. 항상 어긋나던 엄마아빠의 사랑).

등산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정상에 도착하고도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아빠는 말했다.

"야호 한번 해봐." (그땐 산에서 소리치는 게 아무렇지 않던 시기)

순둥이 우리 삼 남매는 티브이에서 본 대로 손을 입에 모아 얌전히 외쳤다.
"야호~"

바로 그때, 아련하게 퍼지던 우리의 메아리를 찢고,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아아악!!"
마치 강도라도 만난 듯, 아니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람처럼 울부짖는 소리에 주변 등산객들이 놀라 우리 쪽을 쳐다봤다. 소리의 주인은 우리 엄마였다. 그리고 그 포효는 그녀식의 야호였던 거다. 사람들의 시선엔 아랑곳없이 엄마는 후련한 얼굴이었고 아빠는 굳은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았다.


갱년기에 접어든 엄마가 등산을 마치고 돌아올 때의 표정이 딱 그랬다. 북한산 어디쯤에, 엄마는 갱년기의 무언가를 하나씩 토해내고 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대로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찌는 걸까."


나는 167센티에 56킬로그램, 늘 그 언저리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암 수술과 항암을 거치며 몸은 사정없이 깎여 나갔고, 체중은 결국 49킬로그램까지 빠졌다. 중학생 이후 처음 본 숫자. 은근히 바라던 체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 병으로 빠진 몸은,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옷을 입어도 포대자루 뒤집어쓴 것처럼 맵시가 나지 않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비루먹은 강아지가 떠오르곤 했다. 난생처음, 살이 좀 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기본 치료가 끝나고 나니 매달 1킬로씩 체중이 늘기 시작했다. 54킬로가 되었을 때가 딱 좋았다. ‘이 몸무게를 평생 유지하자.’ 나름 운동도 하고 식단도 신경 썼다. 그러나 체중은 멈추지 않았다. 딱히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찌지?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갱. 년. 기.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강제 폐경이 되고, 그로 인해 갱년기가 올 수 있다는 말을 병원에서 들은 적이 있다.
3년 전 방사선 치료 후 지금까지 별다른 증상이 없었는데 이제 때가 온 것 같았다. 정보를 찾아보니 갱년기엔 10킬로그램 넘게 확 찌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그로 인한 자신감 상실, 우울감은 기본값. 각종 질병도 덮치기 쉬운 시기였다. 난 엄마처럼 화가 치밀진 않았지만, 엄마와는 달리 체중이 늘어갔다. '이러다 정말 10킬로 넘게 찌는 건 아닐까.'




운동 첫날, 예쁜 근육을 두른 강사님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건강을 위해 찾은 필라테스였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다른 기대가 불쑥 올라왔다. 고민하던 다이어트, 이 운동이면 해결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였다.

'필라테스를 하면 저런 몸이 되는 거야?'
'나도 11자 복근을 가질 수 있나 봐.'

살도 빠지고 몸도 예뻐진다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필라테스를 시작한 첫 주, 안 쓰던 근육을 써서 일주일 내내 끙끙 앓아야 했다. 오후만 되면 기운이 쭉 빠져 소파에 길게 드러눕기 일쑤였다.

‘이렇게 힘든데, 살이 안 빠질 리가 없겠지.’

어깨와 팔다리를 두들기면서도 속으로는 기대에 부풀었다.


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체중은 주춤하지 않았고, 58, 59, 결국 '60'이 찍혔다. 운동하기 전보다 4킬로가 더 찐 거고 내 인생 최고의 체중이었다. 분명 내 몸인데,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몸 어딘가에서 외계 생명체가 증식하는 기분이었다.


혹시 이게 살이 아니라 근육은 아닐까? 체성분 분석기를 찾아볼까? 우리 운동센터에는 없어서 동사무소까지 갈까 고민했다.

그런데 이런 기계에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근육량은 에스트로겐 수치에 따라 출렁인다. 이차성징 시기, 과거 병력, 완경 시기까지, 사람마다 다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로 몸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근육량이 기대보다 적게 나오면?

허무할 것이다. 운동할 맛도, 예전의 즐거움도 사라질 것 같았다. 어차피 다시 별 수 없이 이어가겠지만, 그 마음을 미리 상상하는 것부터가 이미 피곤했다.

어느 날, 피트니스를 2년째 하고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우리 강사님도 내 키랑 비슷한데 체중이 58킬로래. 나도 근육 무게 아닐까."

동생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절대로! 그렇다면 이렇게 배가 나올 수가 없어."


그랬다. 11자 복근은커녕, 내 배둘레햄은 나날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예전 옷들은 하나같이 꽉 껴서 잠기지 않았고, 거울 앞에서 나는 갱년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갱년기는 필라테스도 이겨버리는 것이다.

<2화에서 계속->



keyword
이전 02화필라테스할 때 내가 진짜 참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