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에 대하여
언젠가부터 스트레스 받는 날이면 제일 잘 써지는 펜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 나선 하얀 종이 위에 동그란 검정 볼 하나를 술술 글리면서 일기든 낙서든 일단 의식의 흐림대로 끄적여 보는 것이다. 그렇게 쓰고 난 글들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표현하듯 날려쓴 글씨들 덕에 내가 써놓고도 통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그 중에서도 딱 한 글자, 자음자 ㄹ만은 홀로 반듯하게 항상 획순에 맞춰 예쁘게 쓰여있다. 처음 한글을 배우던 유년 시절의 잊지못할 강렬한 추억 때문이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나의 부모님은 당신들의 큰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로 결정하였다. 두 분 다 교육열이 어찌나 높으셨는지 어느 한 분 양보하지 않은 탓에 나는 번갈아가며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한글을 배웠다. 어쩌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오전에는 엄마, 저녁에는 아빠, 이렇게 총 두 번 배우는 날도 있었다.
ㄹ을 배우던 날이 그랬다. 오전에는 엄마가 ㄹ을 가르쳐 주고, 저녁에는 아빠가 ㄹ을 가르쳐 주셨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내가 ㄹ 획순을 잘못 쓰면서 눈물 쏙 빠지게 혼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ㄹ을 한 획으로 쓰는 게 그리 큰 일인가 싶지만 자녀 교육에 큰 비전과 기대를 품은 부모님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오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총 두 번을 울며 공부하던 나는 네모칸이 그어진 국어공책 가득 반듯반듯하게 ㄹ을 울면서 썼다. 물론 오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 날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나는 ㄹ을 반듯하게 쓰는 어른이자 동시에 획순을 중요시하며 국어공책 가득 글자 연습을 시키는 교사가 되었다. 1학년을 처음 맡게 된 날, 내가 문방구로 달려가 제일 먼저 산 것이 8칸 짜리, 10칸짜리 국어 공책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우리반 아이들은 이를 깍두기 공책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글 미해득으로 일주일에 두 번 남아서 한글 공부하던 단단이(가명)는 그 공책에 누구보다 많은 글자를 썼다. 어느 날은 'ㅏ'와 'ㅑ'를 10줄씩 쓰기도 했고, ㄱ과 ㄴ으로 가득 채운 날도 있었다. 아쉽게도 단단이가 그 공책 한 권을 거의 채워갈 무렵에도, 단단이의 한글 실력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단단이의 경우만 보자면 글자를 열심히 읽고 쓰는 것과 한글 해득은 거의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걸까. 1학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ㅏ와 ㅑ를 구분하여 읽지 못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교사로서의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래서 기초 문해력 연수와 기초학력 연수를 찾아 듣기 시작하였다. 출퇴근 시간만 두 시간에 육박하는 학교에 다니는 지라 차 안에 늘 연수를 틀어놓으며 다녔고, 관련 도서들도 찾아 읽기 시작하였다. 단단이의 한글 해득과 관련한 실마리를 얻게 된 건 어느 교육청 직무연수에서 였다. 난독증 아동들은 통글자 학습이라 불리는 의미 중심 학습법 보다는 발음 중심 학습, 즉 영어 파닉스와 같은 방법으로 한글의 소리와 원리체계를 익히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효과적이다. 다만 그 전에 통글자 50개 정도는 익히고 나서야 제대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전제 조건이었다.
엄마가 베트남인인 다문화 가정의 자녀인데다 가정일에 무심한 아버지를 둔 단단이로서는 통글자 50개는 커녕 본인의 이름 석자가 알고 있는 글자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무지했던 나는 아이의 문해력 환경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매일 팔 아프게 글자 쓰기만 시켰던 것이다.
세종대왕님이 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한다.
"스물여덟자로써 굴러 바뀜이 무궁하고, 간단하도고 요령이 있으며 정밀하고도 잘 통한다."
새벽 바람의 소리와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마저도 표현할 수 있다는 한글, 그 속에는 단순히 치밀한 과학적 원리와 체계성 이전에 어린 백성들을 사랑하던 아버지, 세종대왕의 사랑이 있었다. 그러니 한글을 가르치는 나 또한 단순히 한글 수업 진도를 생각하기 이전에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것이다.
이미 해가 바뀌어 2학년에 진급한 단단이를 생각할 때면 그러지 못했던 기억이 생각나 아쉽다. 다만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기초문해력 수업의 첫 번째 원칙을 세웠다.
아이와 충분히 눈을 맞추고 따스한 분위기에서 가르칠 것.
그 옛날의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던 부모님의 마음 또한 분명 사랑이었을 거라 믿으며 나는 오늘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