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높이에서 머무른다는 것의 의미
7월.
한 학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교과서도 몇 장 남지 않았고, 7살의 얼굴로 입학했던 아이들이 어느새 개구진 8살, 어엿한 초딩으로 변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으레 해 왔던 것처럼 나는 3월에 받았던 기초조사표를 다시 꺼내본다.
기초조사표는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신문 중 하나로, 말 그대로 아동의 기본 인적 사항에 관해 작성하게 된 서류다. 학생 관리를 위해 행정적 차원에서 집 주소, 보호자 연락처 등을 기입하게 되어있지만 내가 진짜 눈여겨 보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있는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 이다. 통계적으로 처리가 불가능한, 하지만 담임교사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아이들의 TMI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아이들을 파악하지 못한 3월에 아이들을 이해하고 지도하는 데 나름 도움이 되고 아이들에 대해 이미 파악된 7월에는 학기초와 비교해 아이들의 변화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선우가 한글을 못 떼서 자신감이 없어요" 라며 3월의 선우어머니가 구구절절 써놓은 걱정글이 무색하게 지금의 선우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글을 잘 읽는다. "편식이 심해 못 먹는 음식은 토한다"고 지아어머니는 써놓았지만, 지아는 요즘 매일 급식시간만을 기다린다(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렇다.) 부모 품에서 작고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어느새 한 학기동안 이렇게 콩나물처럼 쑥쑥 자랐다. 그 모습들이 대견해 웃음이 비죽 나오려는 순간, 현지(가명)의 기초조사표가 눈에 들어왔다. 한 장의 종이로는 부족했던 그 아이의 이야기가.
현지는 신생아 시절, 병원에서 뇌수막염에 감염되었다. 당시 언론에서 한동안 다룰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그 때 왼쪽 뇌에 문제가 생겨 결국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으며 당시 같이 진단받았던 다른 아이들 중엔 현재 거동이 불편한 아이도 있다고 했다. 천만다행히 부모의 기나긴 노력과 치료 끝에 현지는 여느 아이와 같이 잘 걷고 뛴다. 다만 뇌의 발달로 인해 생긴 또래와의 격차는 그 간격이 쉬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 격차는 특히 생각하고 기억하는 걸 어려워하는 데서 나타났다. 방금 배운 내용을 물어봐도 금새 까먹어 아무 말이나 나오는대로 대답하는 데다 조금이라도 연속해서 질문할라치면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건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에 적힌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느껴지는 현지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 때문이었다. 아이를 걷게 하고 뛰게 한 어머니의 사랑에 나 또한 힘을 보태고 싶었다. 열심히 가르치다보면 받침없는 글자 정도는 읽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한 스푼 얹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동안 일주일에 3번씩 방과후에 남겨 개별 한글 지도를 하였다. 40분간 앉아있기 힘든 아이를 위해 한글 요가를 하고, 클레이로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 때로는 공기돌이나 연결큐브로 한글을 공부했다. 말놀이 동요를 부르고 좋아하는 동요에서 자음찾기 활동을 했다. 분명히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교육청에 맞춤지원 컨설팅을 실천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내 요청에 따라 언어치료사 선생님들은 학교를 방문해 아이에게 언어 검사를 실시했다. 그 검사결과를 바탕으로 아이 수준에 맞는 학습 방법과 내용을 지도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검사를 마친 치료사 선생님의 미소 띈 얼굴 어딘가엔 난처한 기색이 보였다.
"선생님, 이 아이에게 제일 좋은 지원은 컨설팅이 아니라 특수교육지원대상자로 선정되는 거예요. 지능이 낮아서 이 아이가 가진 한계가 명확하네요."
어, 그,그래도 기본 자음이랑 모음도 알고 합성도 조금씩 되는데. 당황한 나머지 말이 버벅거리며 나왔다. 하지만 검사 결과와 전문가의 진단 모두 뚜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현지는 한글 해득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어쩐지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유난히 차가 막혔다. 밀리는 차들 틈에서 허탈한 마음을 부여잡느라 몇 번이고 핸들을 새로 잡아야 했다. 조금씩 한글을 깨치는 중이라고 여겼는데 내 착각이었다니. 무엇보다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먹먹했다. 아니, 분명히 무언가 있을 거야. 겨우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간 들었던 연수들과 읽었던 책들을 다시 뒤져보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머무르기'(Roaming around the known)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이 원칙을 떠올리게 된 건 어느 연수자료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현지처럼 느린 아이의 경우, 교사는 아이의 옆에 머물며 찬찬히 살피면서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하여 자신감을 갖게 해야 한다고 했다. 기초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 해득 이상으로 아이가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글자 해득에만 치우치다보니 모든 정신과 에너지를 한글 학습에만 쏟으며 극복할 수 없는 지능적 한계 앞에 좌절하고 있었다.
느린 학습자의 기초 문해력 수업은 일반 아이들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물론 한글 해득도 해야 하지만, 아이의 한계 대신 아이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소통하고 아이를 인정해 주는 것, 거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제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기다리며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교사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닫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현지와 즐겁게 기초 문해력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초조사표를 두 번씩이나 읽었으니 이제는 답장을 할 차례다. 교육청 업무포털에 들어가 담임업무란에 들어간다. 생활기록부에 이번 학기 동안 학생의 출결사항, 수행평가와 동아리 활동 등에 대해 근거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에 대한 나의 답장을 '행동발달 사항'에 적는다. 교과 평어로는 다 서술할 수 없는 학생의 학교생활에 대해 간결하게 그러나 정확한 표현을 사용해서 아이에 대해 기록한다. 이렇게 내가 작성한 생활기록부는 성적표로 출력되어 방학식날 아이들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렇게 성적표를 보내면서 나는 슬며시 소망한다. 부모들이 '행동발달 사항'에 적힌 문장과 문장,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이 아이가 일궈 낸 성장과 앞으로 해 낼 가능성을 발견해 주기를. 그리하여 아이들이 자신을 믿고 따스히 지켜봐 주는 어른들의 사랑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