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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도럽맘’을 만나다

비 오는 날의 박물관 스토리 타임

by 도럽맘

지인을 통해 한 박물관에서 열리는 스토리타임 소식을 들었다.


샌타아나에 위치한 Bowers Museum.


1936년에 개관한 이곳은 세계 각국의 예술과 문화를 전시하는 유서 깊은 박물관이다. 집에서도 20분 거리라 망설임 없이 웹사이트에 들어가 예약을 했다. 다행히 하루 전인데도 예약이 가능했고, 무엇보다도 티켓이 무료였다. 스토리타임 후에는 박물관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주말 계획이 있을까 싶었다.


이 스토리타임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열린다. 특히 매회 다른 주제를 바탕으로, 그림책의 작가가 직접 참여해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무료로 책을 나눠주며 사인까지 해주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도서관에서만 스토리타임을 접해왔던 나에겐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음 날, 설렘에 일찍 눈이 떠졌다.

그런데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어두컴컴하다. 커튼을 젖히니, 캘리포니아에선 보기 드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비는 반가운 존재지만, 꼭 소풍 가는 날 내리는 비처럼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실망한 마음을 누르고, 엘리를 기쁜 목소리로 깨웠다. 아이는 비가 와도 산책 준비하는 강아지처럼 신나기만 하다. 덕분에 번개같이 외출 준비를 마치고, 꿀잠 자고 있는 남편에게 “빨래 잘 부탁해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우리가 좋아하는 파네라 베이글에 들렀다.

블루베리 베이글, 시나몬 베이글, 그리고 크림치즈.

비 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 따끈한 베이글을 먹는 것도 나름 운치 있다. 비가 꽤 세게 쏟아졌지만 무사히 박물관에 도착했고, 정문 앞에서 지인 가족과 만나 함께 갤러리로 향했다.


중남미 또는 미국 원주민 예술품이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 스토리타임이 열리는 갤러리가 보였다. 높은 천장이 고풍스러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아이들은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작가의 책 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모들은 주변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감상 중이다.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스토리타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다양한 예술품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엘리는 용케 자리를 찾아 작가와 눈을 맞출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았고, 집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중간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손도 번쩍 들어가며 대답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귀여웠다.


사진 몇 장을 찍던 중,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반갑게 눈인사를 나눈 후, 그분이 나와 엘리의 모습을 찍어주었다.


한참을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몇 번 마주친 ‘도럽맘’이었던 것이다.


스토리타임이 끝난 후, 박물관 로비에서는 크래프트 활동과 작가 사인회가 이어졌다. 책의 주제는 봄과 개구리의 성장과정을 다룬 자연생물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돌멩이에 초록색 물감을 칠하고 개구리 눈을 붙이며 나만의 개구리를 만들었다. 그 공간에서도 좀전에 눈이 마주친 ‘도럽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대화는 금세 따뜻한 교감으로 이어졌다.


알고 보니 오늘 박물관 이벤트를 알려준 지인의 또 다른 지인. 그분 역시 국제결혼 가정이었고, 하나뿐인 딸과 함께 오랫동안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열리는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한국 엄마들이 이런 기회를 잘 모르고 참석률이 낮아 안타까워요.”라며 지역 커뮤니티 카톡방에 항상 정보를 공유한다는 그녀는 자신을 ‘오지랖 넓은 열정맘’이라 소개했다.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침의 장대비가 거짓말처럼 멈추고 햇살이 반짝였다. 아이들은 박물관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고, 그곳에서도 또 한 가족을 만났다. 얼바인에 온 지 두 달 된 주재원 가족으로, 네 살 딸과 함께 이 프로그램을 찾아왔다고 한다. 나는 “도서관, 꼭 많이 다녀보세요!” 하며 자연스럽게 또 한 번 오지랖을 발휘했다.


집에 돌아와, 함께 만났던 도럽맘과 못다 한 이야기를 문자로 나눴다. 사업도 바쁘고, 노산에 어렵게 얻은 아이지만 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도서관을 열심히 다닌다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깊이 울렸다.


이날 인스타에 그날의 영상과 사진을 편집해 올리자, 한 엄마가 댓글을 남겼다. 전날 내가 올린 스토리를 보고 아이와 함께 박물관에 다녀왔다며, 고맙다는 인사였다. 생각해보니 그곳에 인사를 못나눈 또 다른 한인 가정있었는데 바로 그 한국 가정이었다. 이날 나는 3명의 ‘도럽맘’을 만난 것이다.


요즘 도서관을 다니며 인스타에 그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처음엔 단순히 아이와의 추억을 기록하려는 목적이었고, 도서관 탐방을 계속하기 위한 스스로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만난다. 멀리 한국에서도, 가까운 미국 동네에서도 팔로워가 생기고, 때로는 실제로 만나 커피도 마시고, 언니 동생처럼 지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인스타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라 말하지만 내게 인스타는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따뜻한 창구가 되어 주고 있다. 낯가림이 있는 나지만, 가끔 나와 엘리를 알아보고 인사해 주는 분들이 생기는 이 흐름이 꽤 즐겁다.


다음에는 또 어떤 ‘도럽맘’을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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