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4월 12일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30리 중학교 길을 걸어 다니던 시절 오후 수업을 마치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던 길이었다. 머릿속에는 양지바른 담장 의자에 바짝 야윈 채로 앉아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득했다. 어젯밤에 위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버지의 앓는 소리와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선잠을 잤는데 오늘은 몸이 어떠실까 걱정스러웠다. 아침에 등교 인사를 하는데 막내인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며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옆 동네 어른들은 모내기하느라 논에서 바쁘게 일하고 계셨다. 동 너머 고갯길을 넘으면 우리 집이라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방위 복무 중인 사촌 형이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사촌 형은
“빨리 집에 가 봐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워쩐다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리에 맥이 풀리고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 농사꾼이셨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시어 공부하셨다면 당신의 뜻을 펴실 수 있었을 텐데 그리하지 못하시고 부모님과 여러 형제, 자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사셨다. 너무 많은 속을 태우셔서 그러셨는지 58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만 것이다. 나는 이제 중학생인데 아버지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막막할 뿐이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운 것은 막내 작은아버지가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떠나고 나서부터였다. 안면도 시골에서 서울로 막내를 유학 보낸 조부모께서는 논까지 팔아가며 유학 경비를 마련하시느라 많은 가족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5형제 중에 장남이었던 큰형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본인의 희망은 농업고등학교나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조부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시던 작은아버지는 변함없이 학비를 요구했고 심지에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결국 작은아버지가 시골에 내려올 때마다 큰형과의 마찰은 심해졌고 어린 나는 불안에 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서는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고 장남의 뒷받침을 못한 자책감에 매우 괴로웠을 것이다.
그 사이 조부님께서 돌아가시고 큰형도 결혼해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과 바닷일을 함께 했다. 논일과 밭일로 항상 농사일은 바빴고 겨울 농한기 때는 김 양식과 굴 수확으로 쉴 틈이 없었다. 비 오는 늦가을 어느 날 저녁 농사일을 마친 아버지와 큰형, 몇 분의 동네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큰형의 분가 문제로 큰 다툼이 일어났다. 평소에 읍내 쪽으로 분가하고 싶었던 큰형의 의견을 아버지께서 묵살하는 바람에 앞마당에서 몸싸움이 일어났다. 술에 취해 광분하는 큰형과 아버지의 찢긴 메리야스에 흘러내리던 핏물이 빗물과 섞여 함께 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린 나도 크게 충격을 받아 그 이후로 한참 동안 큰형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께서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았을 때는 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암이라는 병은 사람을 말려 죽이는 병이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수술 후 요양이라도 했을 텐데 당시에는 수술비도 많이 들고 성공 확률도 낮아 수술을 포기하고 요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타리
가을
빈손으로 하늘을 탄다.
거친 벼랑도 심연도 아닌
무공無空으로 무심히 떨어졌던
하지만 필연이었던 한 톨 씨알
날마다 야위어만 가던 병든 아버지
햇빛보다 더 고운 삶의 물을 주던
양지 쪽 하늘타리
하늘 타고 먼 시공時空으로 가려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
오늘은 석류 붉게 타는 저녁
아버지의 하늘이 주렁주렁 달렸다.
오르지 못하는 나무는 멀리서 푸르더니
노을 지는 산자락
저 홀로 피어난 그리움
하늘을 타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위암과 사투를 벌이시다 결국 한 많은 생을 마치시고 말았다.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을 막내인 내가 감겨드렸다. 나는 먹먹한 마음일 뿐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흘간의 통곡 소리가 온 마을에 퍼져갔고 사흘 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조부께서 잡아놓으셨다는 뒷산 명당자리에 아버지께서 묻히셨고 오랜 후에 어머니께서도 그 옆자리에 묻히셨다. 오늘도 두 분께서는 고향 오서산을 바라보는 산기슭에 나란히 누워계신다. 나도 마음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는 부모님의 산소에 올라 마음을 다잡고 내려오곤 한다. 작년에 새로 심은 봉분의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산소 가는 길
고향 길 멀어도
푸른 바다
익숙한 산과 들 있기에
힘들지 않네.
덤불 헤치고 오르는 산길
어릴 적 뽑아먹던
춘란 꽃대궁 보이지 않고
온 산을 환하게 물들이던
진달래꽃도 듬성듬성 피어있네.
산중턱에 이르니
천수만 건너 오서산을 바라보며
사이좋게 누워계신 부모님 봉분
아들들 왔구나.
다정스레 말 건네는 어머니
뗏장 들고 와서 봉분을 헤쳐 가며
대머리 봉분 예쁘게 단장합니다.
부모님 돌아가시던 나이
다들 훌쩍 넘긴 네 아들이
땀 흘리며 뒤늦게 효도합니다.
잘 살아라. 걱정 말고
손 흔드시며 웃으시는 아버지 말씀
가슴 속을 가득 채우며 하산하는 산길
봄꽃들도 웃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