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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⑩막부의 몰락, '보신전쟁'

by 김성웅 Jan 14. 2025

막부-유신의 대결, 보신전쟁 (戊辰戰爭, 1868.1.3 ~ 1869. 5.18)


무위로 끝난 막부군의 교토 진군 (도바-후시미 전투)

유신 정부는 ‘왕정복고’ 쿠데타 당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 반납을 결의했다. 이에, ‘요시노부’는 천황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일단 ‘오사카’ 성으로 퇴거하였지만, 다음 방책을 모색하던 막부는 1월 27일, 교토 신정부를 압박하고 정치권력을 되찾기 위해 ‘사쓰마 정벌’을 선포하였다.    

  

'보신 전쟁' 이전 프랑스식 기병훈련을 받는 막부군 기병대'보신 전쟁' 이전 프랑스식 기병훈련을 받는 막부군 기병대

당시, 쇼군 ‘요시노부’는 1866년 조슈와의 2차 전쟁에서 막부가 패하자, 프랑스군 고문단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훈련시킨 육군, 해군 등 ‘미니에’ 총과 대포로 무장한 신식 군대 병력과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한 기존 무사 등 약 1만 5천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당시, 사쓰마-조슈 연합군은 약 3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1868년 1월 27일, 막부군은 2갈래 진격로로 나누어 교토로 진입하려 기동 하였다. 그런데, 막부군은 자신들의 병력 규모와 위세를 믿고 전투대형을 취하지도 않고 행진을 계속하다, 신형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을 사용하며, 영국식 화력방어 전술로 대치중인 사쓰마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교토 진입이 불가능해졌다. 한편, 창검 등 전통적인 무장을 한 다른 방면의 막부군도 조슈 군의 총격 앞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진지를 새로 구축하고 대치하며, 저항하였지만 두 부대 간 상호지원 불통으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못하고 후퇴하였다.   


천황기 (니시키노미하타, 錦旗)천황기 (니시키노미하타, 錦旗)

그런데, 막부군이 교토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막부군은 ‘조정의 적’으로 규정되고, 유신 정부군이 메이지 조정을 상징하는 금기(천황기)를 들고 나타나 관군의 행세를 하자 이를 본 막부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퇴각하였고,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도 막부군은 패배를 거듭하였다. 유신 정부군이 공식적으로 천황을 등에 업는 대의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자, 사태를 관망하던 여러 번들이 일제히 관군 측에 합류하였으며, 특히, 사쓰마와 조슈 중간에 있던 ‘사가’ 번은 ‘암스트롱’ 화포를 지원하는 등, 관군의 병력과 화력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암스트롱’ 화포와 ‘게틀링’ 기관총 (사진출처: 위키백과)‘암스트롱’ 화포와 ‘게틀링’ 기관총 (사진출처: 위키백과)

유신 정부군의 '에도' 공략 (우에노 전투)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도쿄)’를 공격하는 일인데, 사쓰마번의 ‘사이고’가 이 원정군의 총지휘관이 되고, 조슈번의 ‘오무라 마스지로’가 참모로서 연합하여  파죽지세로 에도성까지 진군했다. 


에도성은 3중 해자를 가진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여전히 많은 친 막부의 번들이 건재하여, 병력의 숫자나 훈련도는 사쓰마, 조슈, 토사 등 3번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만약, 막부가 휘하 번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총공세에 나선다면, 관군이 승리하기는커녕 장기적인 내전이 될 수 있었다.       


이때, 막부 측 지휘관은 ‘가쓰 가이슈’이었는데, 막부가 사쓰마, 조슈 번과의 협상을 위해 그들과 친분이 있는 ‘가쓰 가이슈’에게 전권을 넘긴 탓이다. 그는 대정봉환을 촉구한 ‘사카모도 료마’의 스승이었던 사람이기도하고, ‘사이고’와는 이미 구면이었다. 1864년, ‘사이고’가 사쓰마번 군사령관이 되기 이미 한 달 전에, ‘막부나 번보다도 일본 전체를 생각하며’ 조슈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가쓰 가이슈’를 만났는데, 이때 둘은 첫 대면에서 서로 간에 인간적으로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가쓰 가이슈’는 막부 파였지만, 미국 ‘페리함대’ 도래 전부터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기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23세 때(1846년) 난학(네덜란드학)을 배우려고 어학사전이 필요하자, 이를 빌려 1년 동안 58권의 사전을 전부 필사하고 어학을 공부하고, 서양의 전쟁기술을 배우기 위해, 병학서적도 모두 필사하며 공부하여, 소총과 대포도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사이고’와 ‘가쓰’ 간 서로에 대한 신뢰가 통했을까? 4월11일, '에도'성 공략을 앞둔 양군 지휘관은 차 한잔 놓고 좁은 방에서 담판을 지었다. 도쿄 출신으로 막부의 총지휘관인 ‘가쓰 가이슈’는 막부보다 일본!’이라는 신념으로 주전파의 반대에도, 전쟁 회피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양측의 배후에 영국과 프랑스가 있었고, 막부의 병력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만약 전투가 벌어졌으면 장기전으로 이어져 ‘도쿄’ 시민 약 100만여 명 중 상당수 인명피해와 도쿄의 각종 시설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훗날 ‘가쓰 가이슈’의 회고에 의하면, ‘사이고’는 막부 중진인 ‘가쓰 가이슈’에 대해 시종일관 예의를 잃지 않고 점령군의 오만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군이 에도(도쿄) 성을 인수하고 나서 시내 치안이 문제가 되자, ‘사이고’는 ‘가쓰’에게 “에도에 대한 지금부터의 일을 잘 부탁드린다”라고 한 뒤, 에도를 떠나버렸다 한다. 만약, ‘오쿠보 도시미치’였다면 내정을 하나하나 간섭 했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업무 스타일은 당연히 서로 다르겠지만, 이게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린 요소라는 게 ‘가쓰’의 평이었다.      


결국, '에도' 공략은 ‘도쿠가와’ 가문은 유지하되 영지 1/4로 축소와 쇼군의 생명보장,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군의 무장해제로 타결되었다. 협상이 타결되자, 권력투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미토번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유신 3걸’이 메이지 유신 약 10년 전후로 다 죽은 후에도 35년이나 더 살아남아 ‘공작’ 작위를 받고 1912년에 사망했다.       



보신전쟁 최대 규모의 항전 (도후쿠 전투)과 '에조' 공화국의 항복 (하코다테 전투)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대한 전력을 보유하였지만, 이번에도 ‘대정봉환’에 이어 '왕정복고'를 외치는 유신 쿠데타군에게 쉽게 항복해 버린 이유는, 외세가 내전을 빌미로 개입하여 일본을 식민지화하려는 우려 때문이라는 설, 그리고 교토로 진군하여 역적이 된 것에 대한 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설, 일본 내 각 번들이 양쪽 진영으로 갈라져 장기적인 내전으로 이어질 경우, 나라가 피폐해질 것을 우려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쉽게 항복해 버리자,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려온 '도쿠가와'가문의 가신들은 크게 분노하고, 항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하여 '쇼기타이'라는 막부 불만세력이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난동을 피우기도 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가신들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에도를 떠나, 에도 막부 성립이래 막부를 따르거나 지원해 왔던 '마쓰다이라' 가문의 '아이즈'번 등  후다이 다이묘들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 혼슈 동북부의 여러 번들과 동맹을 맺어 우에노, 우츠노미야, 나가오카 등지에서 유신 정부군과 항전을 벌이게 된다.  

       

'아이즈' 번의 쓰루가성 천수탑 1868년 보신전쟁 격전지, 출처: 나무위키'아이즈' 번의 쓰루가성 천수탑 1868년 보신전쟁 격전지, 출처: 나무위키

처음에는 '동북부(도후쿠) 연합'을 구성한 이들 번의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도후쿠'지역을 서, 너달 안에 평정하지 못하면 유신정부가 와해될 것임을 우려한 유신정부는 삿쵸동맹을 중심으로 강력한 유신 군을 파견하자, 점점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아이즈’ 번을 제외한 대부분의 번들은 장비가 부족하고 재래식 군대로 무익한 저항을 하다가 파멸되기보다 곧바로 항복해 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은 가장 강력한 ‘아이즈’ 번마저 얼마간의 농성전 끝에 항복하였다.

     

당시 최고의 신무기 '게틀링' 기관총(출처: 위키백과)당시 최고의 신무기 '게틀링' 기관총(출처: 위키백과)

그렇지만, 항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몇 정 없었던 ‘게틀링’ 기관총을 소유하고 있었던 ‘나카오카’ 번 등, ‘아이즈’ 번을 제외한 대부분의 번들은 '북부 연합'을 구성할 때의 기세와 달리 장비가 부족하고 재래식 군대로 무익한 저항을 하다가 파멸되기보다 곧바로 항복해 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은 가장 강력한 ‘아이즈’ 번마저도 농성전 끝에 9월22일 항복하였다.    


다만, 1862년대에 네덜란드로 유학 가서 6년 만에 네덜란드가 제작한 최신예 군함을 타고 귀국한 뒤, 막부 함대를 이끌었던 ‘에노모토 다키아키’ 막부 해군지휘관 등 잔존세력이 10월 20일,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에조 공화국’이라는 자체 정권을 수립하고 신정부군과 해전까지 벌였다. 


보신전쟁 상황도(출처: 위키백과)보신전쟁 상황도(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이마저도 패배하고 1969년 5월 17일 항복하면서 약 1년 6개월 여에 걸친 ‘보신(무진) 전쟁’이 끝나며 막부는 몰락하였다. 다만, 유신정부는 '전후 처리' 문제에 '보복보다는 안전'을 택하였고, 심지어 대외적인 평판을 고려하여 막부파의 주요 직위자들을 처형하기보다 2~3년 정도의 투옥 후 석방시켜 새 정부에 중용하였다. 예컨대, '에노모토 다키아키'는 러시아, 중국 대사를 거쳐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보신전쟁'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사쓰마, 조슈와 인접한 번 등 교토 서부의 여러 번들은 전쟁 피해가 거의 전무하였고, 교토와 에도 사이에 위치한 번들은 피해를 비교적 가볍게 입었던 편이었으나, 막부의 지지기반이었던 동북부 (도후쿠) 지방 ‘후다이’ 각 번들의 피해는 엄청나게 심대하였다. 이 지역의 피해는, 거의 40여 년이 지난 1910년대 중반 ‘다이쇼’ 천황 시대가 되어서야 복구되었다.  


이 전쟁은 오랜 봉건제도 해체 작업을 가속화 시켜 신정부의 개혁 행보에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세력들을 자연스레 소멸시키고 유신의 성공으로 근대 일본이 새로운 국가와 사회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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