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⑮일본 근대화의 철혈(鐵血)재상

by 김성웅 Jan 23. 2025

유신 정부의 철혈재상 오쿠보 도시미치


'철혈 재상'하면 '경제(鐵)와 전쟁(血)'으로 유명한 독일(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떠올리게 되는데, 일본인들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같은 이름을 붙였다. 사실, ‘오쿠보’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독일을 방문하는 동안 ‘비스마르크’로부터 큰 감명을 받아, 향후 그의 개혁 정책의 방향이 되었고, 일본의 법적 인프라가 독일을 베낀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오쿠보’의 사후,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이토 히로부미’도 똑같이 ‘비스마르크’를 흠모하였고, 일본 제국 헌법을 기초할 때 독일 법 체계를 많이 차용하였다는 점이다.


‘유신 3 걸’ 중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역시 ‘유신 3 걸’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사쓰마번 ’가고시마‘의 '가지야초'라는 조그마한 마을 (지금의 가고시마 중앙역 근처)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라, 배가 고플 때면 그나마 형편이 나은 개울 건너 ’사이고‘의 집을 찾아가서, ’사이고‘와 후에 일본 해군 원수가 된 ‘사이고’의 친동생 ‘쓰구미치’의 밥을 나누어 먹었다. 식솔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사이고 형제는 헤엄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번한 '오쿠보'를 구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이릴 때의 모습과 달리, 성장할수록 뛰어난 판단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책 읽는 무사’ 중에서 유명해진 ‘오쿠보’는 ‘성충조’라는 하급 사무라이들을 결속하여 ‘초망굴기’를 꿈꾸었다. 그렇지만, 많은 변란에서 번의 권력과 힘을 실감하고는 과감하게 변신하여 다시, 번주의 눈에 들고자 바둑까지 배우는 등 노력 끝에 눈에 들어 발탁되었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막부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하급 사무라이 시절 '오쿠보 도시미치'하급 사무라이 시절 '오쿠보 도시미치'

반면, 직설적인 ‘사이고’는 번주 ‘나이아카라’의 발탁으로 입신하였지만, 그의 사후 새 번주와의 불화로 유배를 거듭하다, 훗날 ‘오쿠보’의 추천을 받아 정계로 복귀한 후 조슈 번과의 전쟁으로 갑자기 부상하였다. 이후, 둘 다 사쓰마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868년 ‘왕정복고’ 쿠데타로 유신 대업을 함께 해내었다.      

‘왕정복고’ 쿠데타에서 ‘사이고’가 무력 동원의 일등공신이라면, ‘오쿠보’는 일본의 마키아벨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정치공작의 대가였다. 그는 유신 정부에 참여하며 초대 내무경 (관직 임명권과 경찰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1인지상의 강력한 권한을 가진 각료)이 되었고, 유신 개혁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한 ‘판적봉환’(1869년 7월)과, 중앙집권을 위한 ‘폐번치현’ (1871년 8월)의 과정에서 구 막부세력에 단호하게 대처하였지만, 항상 퇴로를 열어두어, 오도가도 못할 궁지로 모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 번의 땅을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공고, 우측은 '오쿠보' 각 번의 땅을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공고, 우측은 '오쿠보' 

이것이 큰 무력충돌 없이 개혁이 추진된 동력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무능한 조정 대신과 각 번에서 온 인원을 축출하고 난 뒤, '막부가 붕괴되면 막부의 중심이던 에도에서 시민들이 모두 떠나야 하는 문제가 있고, 수도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야 한다'는 등 '기도'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천황과 정부도 1868년 11월 수도룰 교토에서 에도로 옮겼다. 


그리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정부 내 구세력이 완전히 일소되자, 유신 후 3년 만에 '오쿠보' 중심의 개혁파들이 완전히 득세하자, '오쿠보'는 서양 문물을 체험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에 포함되어 견문을 넓혔다. 하지만, 1873년, 사무라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사이고’의 정한론이 대두하자, ‘이와쿠라’ 사절단에 합류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복귀하여 '정한론'에 반대하자, 정한론은 이들 연합세력 앞에 굴복하여 철회되었다. 이후, ‘사이고’가 퇴진하자,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서양식 수염'오쿠보 도시미치'의 서양식 수염

전술한 바와 같이, ‘오쿠보’는 1872-1873년 간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그 기간 중에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보면,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적자생존 (適者生存)의 정신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촌마게’라는 일본 사무라이의 상투와 전통의식이 촌스럽다며 상투를 잘라 버리고, 양복으로 갈아입기를 동료들에게 권하였다. 무사가 무사의 상징인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결연한 의지'의 발로로 간주되었다. 그와 동행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10여 년 전 영국 유학을 위한 밀항 시에 신분을 숨길 요량으로 상투를 잘랐었다. 


한 가지 일화로, ‘오쿠보’의 수염은 매우 특이한데, 이게 서양에서 사가지고 온 가발(?)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이라면, 외국을 본받으려면 뼈끝까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었다. 이를 보면, 일본 무사들은 조선이 왕국 개혁의 마지막 단말마적인 고심 끝에 내린 ‘단발령’ 마저, 상투 그 자체를 놓고 "신체발부 수지부모..." 운운하며 '죽기 살기'로 항거하던 딸깍발이 유생들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복장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양복은 일종의 평등의 의미이기도 하다. 계급에 따라 복장과 장식이 다른 일본과 달리, ‘오쿠보’가 미국 조야에서 자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고 나온 모습을 보고 놀라 매우 인상 깊게 느낀 사항이었다. 계급과 평등의 차이를 느꼈던 것이다.    


여담으로, 개인적으로도 미국의 부강에 놀란 ‘오쿠보’는 원래 프랑스 유학을 위해 함께 데리고 간 아들 둘을 미국에 남겨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미국을 열심히 배운 탓일까? 훗날 이들은 일본 졍계의 거물이 되었고, 사위까지도 수차례 총리를 역임했고, 손자(아소 다로)까지 총리가 되었다.       


'오쿠보'는, ‘프로이센’에서 철혈재상(鐵血宰相‘비스마르크’를 만나고 나서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에 프로이센(독일)의 재상으로 취임한 이래, 프로이센의 산업화를 추진하고 대규모로 군비를 확장하는 정책으로 산업(철)과 군사력(혈)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내부의 여러 공국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로 통일한 뒤, 프랑스 등 외적을 몰아내며 팽창주의 정책으로 나아간 때문이었다. 이는 분권적인 번을 폐지하는 '폐번치현'으로 중앙집권화 하고 내전을 거쳐 통일한 당시의 일본에게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정부의 최고위 각료 ‘오쿠보’는 독일을 모델로 삼아 일본이 추구하는 방향을, ‘부국강병’에 두고 정부 주도의 국가운영과 경제개발 정책을 시행하였다. 먼저, 군사/외교 문제에서 ‘1874년 대만공략’ 등 부국강병책을 진두지휘하였고, 청나라의 ‘리훙장’과 담판하여 배상금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 외교문제가 종식되자, ‘대만공략’에 반대하며 자리를 떠났던 ‘기도 다카요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이 서구를 둘러보았을 때, 무엇보다 갖고 싶었던 제철 등 '공업력'을 갖기 위한 ‘경제발전과 공업화’를 함께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노력에 역행이나 하듯, ‘사이고’를 위시한 많은 지난 정권 요인들은 불평 사무라이들을 집결시켜 무장봉기를 계획하다 결국, 1877년 ‘사이고’와 그 휘하의 인사들이 자유민권운동을 제창하며, 죽마고우 ‘오쿠보’의 독재를 비판하고 의회를 조기 개최할 것을 요구하며, 이른바 ‘서남전쟁’으로 천황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양을 배워 그보다 강한 일본을 건설하겠다’라며, ‘서구와 겨룰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오쿠보’에게 ‘사이고’의 봉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처럼 ‘기가 막히도록 한심한 일’이었다. ‘사무라이’의 기득권을 외친 ‘사이고’의 반란은 불과 몇 개월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오쿠보’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 이후, ‘오쿠보’는 지조개혁(地租改革)과 식산흥업을 상징하는 경제발전을 내세우며 ‘메이지 유신’의 ‘철혈재상’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사실, ‘오쿠보’는 ‘근대 일본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메이지 시대 대부분의 인프라를 건설하여 근대 일본의 초석을 다지는 등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가고시마 현에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가고시마 현에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

그럼에도, 그는 사무라이 동료들의 눈에는 ‘무사도를 배신한 사무라이, 사쓰마번을 버린 배신자’였다. 결국, ‘사이고’의 죽음으로 원한에 맺힌 일부 사무라이들이 1878년 그를 암살하였다. ‘앞으로 10년 더 일하여 일본을 흥하게 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유신 3 걸 중에 ‘기도 다카요시’는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사이고 다카모리’보다 같은 해지만 먼저 병사(결핵)하였다. 반면에, '사이고'를 제압하고 승승장구하던 ‘오쿠보’는 ‘사이고’가 죽은 후, 8개월 만에 '사이고'를 숭배하며 ‘개혁에 반대하던’ 일단의 사무라이들에게 암살을 당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세등등하였던 40대의, ‘유신 3 걸’이 모두 1년 사이에 죽었다. 


그 정치적 공백은 너무 컸다. 하지만, '오쿠보'의 계획과 구상은 그가 죽은 이후 1880년대 그가 총애하였고, 그를 추종하였던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지금껏 일본 사람들에게 ‘오쿠보’의 인기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일본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철혈재상’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죽은 뒤, 남겨진 ‘오쿠보’의 재산은 온통 빚뿐이었다고 한다. 가끔, 너무 청렴하거나 일을 많이 한 사람보다 때를 잘 맞추어 멋지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명예나 인기를 더 누릴 수도 있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⑭ ‘정한론’과 마지막 사무라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