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번째 공간의 기억은 바다와 산이다.
도시의 아파트 숲에서 자란 유년의 일상은 늘 회색빛이었다.
하지말 주말이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변했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면 펼쳐지는 오색 빛의 풍경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듯 했다.
도로위를 달리는 차안에는 따뜻한 숨소리와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어머니가 준비한 은은한 도시락 냄새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목적지를 궁금해 하며, 나와 동생은 머리를 맞댄 채 잠들었다.
그 주말의 작은 탈출은, 바쁜 도시생활에서의 숨을 고르고 불안하고 복잡한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이른 아침 바닷가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했다.
우리가족은 주로 가장 가까운 섬인 영종도를 향했었다.
지금은 인천대교와 영종대교를 통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내가 어릴적엔 월미도에서 배를 타로 15분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섬이었다.
그렇게 우러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해변에 도착하면,
기다렸다는 듯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바닷가를 뛰어다녔다.
발에 감기는 듯 따뜻했던 모래, 차갑고 시원한 바닷물, 썰물이면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갯벌 진흙의 감촉까지 발 끝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수많은 감촉이 온몸을 반기는 순간이었다.
바다 위에서 춤추듯 반짝이는 햇살과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져 주었고,
해송 그늘 아래, 돗자리에서 도시락을 나눠먹던 그 순간,
바다는 아무말 없이 내안을 가득 채우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산은 바다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품어주었다.
어릴적부터 항상 뛰놀았던 뒷산 초입의 흙내음은 고민없이 숨을 깊에 들이쉬게 하였고,
부드럽게 깔린 낙엽을 밟으며 아버지와 등산로를 나란히 걸었다.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속에서 산을 오르는 시간은 마치 명상과 같았다.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숨은 차고,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점점 가벼워 졌다.
정상에 올라 바라본 탁 트인 시야는 답답한 마음 속을 뻥 뚫리게 만들었고,
나에게 고생했다고 조용한 위로를 전했다.
산은 나에게 빠르게 걷기 보다 천천히 걸어야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또 오르면 마주하는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을 선물해 주었다.
어린시절 나는 깨닫지 못했다.
주말마다 떠났던 짧은 여행이 내 안에 평온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는 것을..
시원한 파도의 감촉, 숲속의 향기, 해송 그늘아래 불어 오던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차고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모든 순간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닌
마음속 어느 깊은 곳에 감정의 저장소가 되어
어른이 되고 삶이 지치고 힘든 순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되새기며,
그 기억들을 발판삼이 쓰러져 가는 나를 다시 일어켜 세울 강력한 힘이 되었다.
인생의 무게에 눌려 무너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을 다른 무엇도 아닌 어린시절의 기억이었다.
숨 막히는 사무실과 차가운 현장에서 불안이 엄습해오면
나는 자연스레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갔다.
바람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으면,
평온했던 어린시절의 바람이 다시 내 곁을 찾아와 흔들리는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듯 했다.
그 때 깨달았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몸, 감정을 위로하는 힘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디자인이 아닌 감각에서 시작된 공간.
삶이 무너질 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공간.
오늘도 그 평온한 기억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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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us 한문장
"공간은 기억의 저장소이자, 평온을 되찾는 감각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