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정 Sep 03. 2024

[사무관 승진] 어떤 실적이 좋을까?

2010년 어느 날,

따르릉! 따르릉!!

인터폰을 들자마자 들려온다.


“나 국장이야, 좀 올라오지”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라며 수첩을 챙긴다.

 

3층 국장 방에 들어서자. 손님도 계신다.

“조 주무관, 인사하지, 교육의원 ***님이야”

“안녕하세요? 중등교육과 조희정 주무관입니다.”

 

이어, 소개받은 그가 말한다.

“이번에 내가 이사를 했는데, 손자 녀석 학교가 너무 멀어서 말이야, 가까이 옮길 방법이 있나?”

 

가관이다. 고압적인 건 물론이고, 초면인데 다짜고짜 명령조다.

‘뭐 이런 사람이 있지? 교육의원이면 좀 더 점잖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설명을 이어간다.

 

“전·입학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며, 하나는 구 단위 또는 학교군이 다른 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면 자연스럽게 전학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교육 환경 변경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구구절절한 설명은 되었고요. 인천**고등학교로 가고 싶은데, 가능하죠?”

손님이란 분이 아예 학교까지 지정하여 말한다.

“그 학교 정원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수첩을 뒤적이며, 월초에 결재받아 복사해 둔 ‘학교별 전·입학 가능 학생 수(3월)’에서 학교를 찾는다.

 

다행이다. 여유 인원이 있다.

“전·입학 자리가 한자리 비어 있어 가능합니다. 필요한 서류를 적어 드리겠습니다.” 

 

주소를 그대로 둔 채 학교를 옮겨가는 전·입학은 교육 환경 변경이란 제도다.

그 제도는 전·입학 허용 비율과 무관하게 학교를 옮길 수 있다.

 

일부 학부모는 교육 환경 변경 제도에 대한 안내를 받아도 꺼린다. 

혹시라도 대학 진학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렇듯 유력 인사의 부탁이나 청탁을 들어드렸다. 

이런 업무를 유연하게 잘 처리하고 대응해야 교육청의 유능한 직원이라는 칭찬과 함께 인정받던 시절이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구나 공정하게 제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육청 주요 간부나 중등교육과를 거쳐 간 관리자들은 부서장에게 청탁한다.

이런 사안들이 담당자에게 전달되고, 

결재권자는 “무리 없이 처리하라" 라고 말미를 장식한다.

 

고민하던 어느 날,

비밀 장부처럼 운영된 ‘학교별 전·입학 가능 학생 수를 홈페이지에 공개하자’라고 생각했다.

 

전·입학 알림이 구축’이라는 한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었고, 팀장과 과장께 설명했다.

상황, 문제점, 근본 원인, 대책, 효과 순으로 말씀드렸다.

 

인천교육청에서 연간 처리하는 전·입학 학생 수는 거의 1천 명이다.

문제는 분명했다.

학생 수 대비 학교수는 적고, 거기다가 학교별 여건이 제각기 다르다.

희망교를 배정받지 못했거나, 원거리 통학이 싫은 유력 인사들은 권력을 동원하여 교육청을 압박했다.

 

전·입학 가능 인원의 비공개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걸 공개하면 청탁 문제가 한 방에 해소되겠구나!’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답은 ‘홈페이지 구축이다’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구축할 홈페이지의 대략적인 형태를 제안했다.

 

학교에서 학적 변동을 입력하면, 웹사이트에서 자동 반영되어 전·입학 허용 인원을 계산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서 그 인원을 실시간으로 공지한다.

 

그런데 홈페이지 구축에는 두 가지의 큰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예산, 두 번째는 기술력 부족이다.

 

소요 예산은 3백만 원 정도였다.

전년도에 미리 계획한 사업이 아니라서 예산이 확보되지 못했다.

 

옆자리 장학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집행잔액 사용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교육과정 운영을 담당하던 그분은 흔쾌히 허락했다.

 

기술적인 문제는 전산직렬 동료의 도움이 컸다.

내가 설명한 것에 덧붙여 홈페이지의 세부 메뉴를 만들어 주었다.

 

예산과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업체를 선정하고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관계자에게 시연도 했다.

사용 설명서에 대한 학교별 담당자의 연수도 진행했다.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관내 모든 고등학교에서 수십 년간 수행해 온 매월 1일 자 학생 수 보고 업무가 사라졌다.

교육청의 학생 수 취합, 전·입학 허용 가능 학생 수를 산정하던 업무도 생략됐다.

 

무엇보다 비밀 장부처럼 운영하던 전·입학 가능 학생 수 결재가 필요 없게 되었으며, 

유력 인사의 전·입학 전횡이 발을 붙일 여지가 없어졌다.

 

당시의 팀장과 과장도 온갖 청탁을 들어주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전·입학 알림이 구축을 제안했을 때, 두 분 모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감사한 이들이 여러분이다.

 

이 제도는 몇 해가 지나면서 중학교까지 확대되었다.

현재까지도 본청과 지원청 홈페이지를 확인해 보면, 고등학생과 중학생의 전·입학 허용 인원이 학교별로 공개되고 있다.

 

30여 년 가까운 공직 생활을 이어온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제도 개선이고, 

청렴한 교육행정을 도모한 잊지 못할 사건이다.



이런 실적이 있다면, 

누구든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도를 개선했고, 

학교 담당자의 업무를 획기적으로 감축했다.

투명한 업무처리로 청렴한 공직사회 조성에 기여했고, 

무엇보다 학생과 학부모의 편리를 도모했다.

동료, 다른 부서와 협력을 통하여 업무를 추진했고,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필자가 실적서를 처음 준비할 때, 이 건은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멘토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고, 수용했다.

그 효과는 엄청났다.


당일, 면접관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필자를 승진자 대열로 이끌어준 마중물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사무관 승진] 서열 후진,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