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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육아 Feb 21. 2023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

11 병원 vs 병원

  조리원으로 돌아온 나는 수술 부위의 실밥을 풀러 병원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그날의 당직의 이자 나의 분만의였던 선생님이 휴진이라고 하며 다른 과 선생님의 진료를 잡아준다. 막달 검사는 1과 선생님께, 수술은 7과 선생님께, 실밥은 5과 선생님께. 이 병원에서 나의 산전, 산후를 온전히 아는 의사는 과연 누구일까.



  처음 보는 쾌활한 선생님이 실밥을 풀어주셨다. 긴장되었다. 가위질을 하는 소리. 핀셋으로 실밥을 하나씩 뽑아낼 때마다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원장님! 분만실에서 응급이랍니다.”

  “응, 바로 내려간다 그래.”


  의사 선생님은 수술자국 가장자리에 남은 실밥 하나를 잡아당겼다. 톡톡 여러 번, 다시 힘을 주어 여러 번. 살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실밥은 뽑히지 않았다. 또다시 벨 소리가 들렸다.


  “원장님! 분만실에서 빨리 내려오시라고 합니다.”

  “응. 다 됐어. 바로 간다고 해.”


  하지만 그 실밥은 여전히 빠지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 심장이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분주한 분만실의 상황이 그려졌다. 수술대에 누워 수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실제로는 그리 길지 않았을테지만 산통 중인 나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지던 그 긴 시간이 떠올랐다. 지금 분만실의 누군가는 그때의 나처럼 지옥의 시간을 겪고 있을 터였다.


  “선생님, 분만실에 먼저 다녀오셔도 돼요.”

   아직 나의 처치가 끝나지 않았지만, 괜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인 내가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마저 하고 내려가면 돼요. 거의 다 됐어요.”


  나는 더 이상 가시라고 권유할 수가 없었다. 그 지독하게 뽑히지 않던 실밥은 더욱 힘을 실은 손길이 여러 번 더 가고서야 마침내 뽑혔다. 의사 선생님은 다 됐다, 고생하셨다는 말을 남기고 뛰어나갔다.



  실밥이 뽑힌 자리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이 병원에서는 정말이지 사소한 어느 하나도 좋은 기억이 없다.






  8일 차 저녁면회.


  택시에서 내려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올라가서 꼼꼼하게 손을 씻고 비닐 앞치마를 앉고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7시가 되자 집중치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선생님이 면회 시작을 알린다. 여기까지는 오늘 낮과 동일했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모모의 자리. 그런데 침대 주변에 놓인 기계가 하나도 없다. 그동안 빽빽하게 서있던 기계의 수가 차츰 줄긴 했었으나 이런 휑한 느낌은 처음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침대로 가서 누워있는 아기를 보았다. 모모가 아니었다. 이름표를 얼른 보았다. ㅇㅇㅇ(내 이름) 아기라는 이름 대신 낯선 이름이 있었다. 다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서 신생아 집중치료실 테두리를 빙 둘러 놓인 여러 개의 침대를 재빨리 훑었다. 그런데 침대마다 붙은 이름표 속의 글자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병원에서 아기가 바뀌는 일 등 온갖 불안한 이야기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눈앞에 모모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호흡이 가빠졌다.


  “ㅇㅇㅇ아기, 어디 갔어요?”


  간호사에게 묻자 모모가 있었던 자리와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자리를 옮겼다고 얘기해 주었다. 간호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른 걸어가 보았다. 그곳에 그동안 침대 머리 맡을 지키던 모든 기계와 작별을 고하고, 아무런 호스도 달고 있지 않은 모모가 눈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지금의 모모는 집중 치료실 안의 여느 아기들처럼 약간의 치료가 필요하긴 하지만 ‘망가지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부어서 부른 배가 아니라 엄마의 모유를 든든하게 먹고 부른 배. 입 속에 꽂힌 튜브 때문에 입으로 하는 어떤 행동도 못해서, 과연 얘가 울기는 하나 싶었던 모모가 이제 입으로 칭얼대는 소리도 내고, 하품도 하고, 딸꾹질도 한다. 이제 더 이상 배경음처럼 들리던 ‘삐… 삐…’  하는 기계음도 없고, 모니터 상의 숫자들을 신경 쓰지 않고 모모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모를 보고 있자니 눈이 부셨다. 모모의 몸을 비추고 있는 광선이 하나 둘 셋. 치료실에 있는 광선은 죄다 가져다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모모가 이제 아주 잘 먹어서 하나 남았던 영양제 튜브도 빼 버렸고, 호흡 수는 모유 먹고 나면 잠깐 가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수치라서 호흡기도 떼어버렸다고 했다. 이틀 뒤에 퇴원하는 것을 목표로 황달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치료 광선을 세 개나 켜놓았다고도 했다.


  ‘이 아기, 이제 퇴원시켜 보자’며 의기투합하였을 선생님들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져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 세 개의 광선을 보고 있자니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 그리고 신생아 집중치료실의 간호사 선생님들의 정성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들은 모모에게 다시 숨길을 불어넣어 준 신이자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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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망가진 인형”에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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