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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육아 Feb 27. 2023

우리 가족의 광복(光復)

14 모모의 퇴원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제일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어제 실밥을 뽑은 자리에 피가 맺혔던 터라 수술 부위가 다 아물지 않은 것은 아닌지 조금 무섭긴 했지만 샤워도 하고,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준비를 마쳤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울린 벨 소리.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걸려온 전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ㅇㅇㅇ아기 보호자님 맞으시죠? 신생아 집중치료실이에요. 오늘 아침에 검사 다 진행했는데, 수치가 전부 정상으로 나와서 오늘 아기 퇴원 하려고 해요.”

“아… 정말요? 네네, 갈게요. 언제 가면 될까요?”

“퇴원 수속도 밟아야 하고 주의사항도 알려드려야 하니 되도록 오전 중에 오시면 좋겠어요. 오실 때 아기 옷이랑 속싸개랑 겉싸개도 가지고 오세요. 짐 담을 가방이랑 모유 남은 것도 가져가야 하니 보냉가방에 아이스팩도 넣어오시고요.”

“네! 한 시간 이내로 갈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바로 모모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녘에 퇴근했을 모모아빠 역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아침 일찍 일어나 있었다. 모모아빠에게 모모 방의 서랍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옷과 속싸개와 겉싸개를 가지고 오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조리원 실장님께 아기가 퇴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산모님, 제가 뭐랬어요. 여기 계시는 동안 아기 데려오실 수 있을 거라 했죠. 정말 잘됐어요. 축하드려요!"


  실장님을 비롯한 조리원 신생아실의 선생님들이 모두  일처럼 함께 기뻐해주었다. 나는 외출신청서에  적던 '아기 면회'라는 글자 대신 '아기 퇴원' 적었다. 똑같은  글자. 하지만 '아기 면회'라는 글자를 적을  마지막 글자를 적는 손이 항상 느려졌었다면, 오늘은 재빠르고 일정한 속도로  글자를 적는다.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는 내 입가에 살짝 미소마저 감돌았다.


  잠시 후, 조리원으로 온 모모아빠와 함께 모모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돌아올 때는 모모도 함께라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행여, 우리에게 어떤 변수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약간의 불안이 섞인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생아 집중치료실 앞. 면회 시간이 아닌 때에 여기에 온 것은 처음이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기가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먼저 퇴원 수속을 밟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수납을 하기 위해 원무과로 내려갔다. 스무일곱 장의 진료비 세부내역서가 출력되는 동안 또 다른 염려로 초조해졌다. 작년 이맘때쯤, 하쿠를 하늘나라로 보낸 뒤 받아 든 기나긴 영수증에서 우리는 이미 기 백만 원의 숫자를 봤던 터였다. 대학병원, 거기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그곳에서 가능한 모든 치료와 검사를 받으며 열흘 간 있었던 모모에게는 과연 얼마의 비용이 청구될까. 우리는 두툼한 서류 뭉치와 함께 진료비 영수증을 받았다. 그리고는 얼마의 비용이 나오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쁜 마음으로' 지불할 것이라 마음먹고 영수증 맨 아래 숫자들을 읽었다.


  29,729,500.


  일, 십, 백, 천, 만…

  이천구백만…


  잠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숫자 모두가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진짜 우리에게 부과된 ‘본인부담금’ 항목이 보였다.


  1,722,860.

 

  처음의 감당하지 못할 여덟 자리의 숫자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곱 자리 숫자로 바뀌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의료보험 체계가 무려 2800만 원이라는 숫자를 덜어준 것이다.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하며 언젠가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던 모모아빠는, 이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제일 살기 좋은 나라라는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동경하던 나라들 중 하나에 살다가 똑같은 일을 겪었다면, 우리 모모가 그렇게 빨리 최고의 의료진에게로 옮겨져 처치를 받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설령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영수증에는 듣도 보도 못한 천문학적 숫자가 적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제는 광복절. 덕분에 퇴원이 하루 늦춰지긴 했지만, 어쨌든 대한독립만세, 우리나라 의료체계 만세, 모모 만세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의 해방일, 그리고 오늘은 우리 가족의 해방일이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다시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올라갔다. 간호사 선생님이 퇴원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일주일 뒤 외래진료가 잡혀 있으니 그때까지 아기를 주의 깊게 살피고, 황달 수치는 언제든 다시 오를 수 있기 때문에 황달이 심해지는 것 같거나, 다른 이상 증상이 있으면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 주신 퇴원 안내문에는 모모의 치료결과가 ‘완쾌’가 아닌 ‘호전’에 체크되어 있었다. 그 체크란의 선택지 중에는 ‘호전 안됨’, ‘가망 없는 퇴원’, ‘사망’이라는 란도 있었다. 무서운 단어들이었다. 모모의 퇴원에 붙은 이름이 비록 완쾌는 아닐지라도 뒤의 세 단어가 아님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모는 그새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동안 알몸으로 기저귀만 달랑 차고 있었던 모모가 임신이 확정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사두었던 그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색 고래가 그려진 옷이 모모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아직 더운 여름이지만 모모는 고래가 그려진 속싸개도 하고 안전하게 겉싸개도 둘렀다. 두툼한 서류봉투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쓰던 체온계, 물티슈, 기저귀 등을 담은 종이가방, 그리고 미처 다 먹지 못한 얼린 모유를 담은 연두색 보냉가방까지 짐이 한 짐이었다. 모모아빠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나는 모모를 안았다. 처음으로 모모를 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두툼한 겉싸개 때문에 그냥 두꺼운 이불을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 아직 모모를 품에 안았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모모는 두꺼운 이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모모아빠와 나는 모모 대신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우리 아기를 살려줘서 고마웠어. 우리 모모가 살아난 이곳,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간호사 선생님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평소에 보던 선생님들이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들 또한 언제나 온 마음을 다해 신생아 집중 치료실의 아기들을 돌보실 터였다.

  

  "그동안 저희 아기 잘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무사히 퇴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드리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목이 메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미처 다 하지 못한 마음속의 말들을 전하며 그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길,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막 나온 모모가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좁은 공간에 있는 게 걱정되었다. 나는 모모에게 행여 나쁜 숨길이라도 섞여 들어갈까 봐 겉싸개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려주고는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대학병원 문을 나서다 나는 발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여보, 잠깐만!”

  짐을 들고 앞서가던 모모아빠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사진 하나만 찍어줘. 그래도 모모가 살아난 곳인데, 기념으로 사진은 한 장 남겨놔야 할 것 같아.”

  나는 모모아빠에게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겉싸개 속에서 고이 잠자고 있는 모모와, 모모를 처음으로 안고 활짝 웃는 내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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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망가진 인형”에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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