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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육아 Mar 05. 2023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17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

  모모가 조리원으로 들어오고 나서 나는 밀렸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지 못하고 있었던, 조리원 패키지 안에 들어있는 각종 마사지들과 치과, 피부과 진료들의 예약을 잡았다. 조리원 퇴소까지 매일 하나 이상의 스케줄을 소화해내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 외의 시간들에는 밥을 먹고 여느 산모들처럼 콜이 오면 신생아실로 가서 직접 수유를 하느라 낑낑대고, 방에서는 열심히 유축을 하고 나면 하루가 지나갔다. 조리원이 이렇게나 바쁜 곳이었다니.


  그 일반적인 조리원의 일상 외에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와 모모의 보험 청구서를 작성하고 관련 서류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임신 7주 차에 들어 두었던 태아보험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았더니 어떤 남자가 자신을 내가 출산한 병원의 총무과장이라 소개했다. 그리고는 아기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으면 한다고 했다. 나는 그날 오후 그 건물의 다른 층에서 그 총무과장이라는 분을 만났다.


  우리 부부 또래의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한 아이의 아빠인지라 내가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모모의 상태를 물었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들은 그대로, 뇌 손상이 생겼고, 향후 몇 년간 아이가 자라는 동안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는 병원에 이런 사고를 대비하여 들어둔 보험이 있으니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다고 얘기했다. 그날 모모를 대학병원으로 태워 간 구급차 비용도 청구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출산 과정에서 병원에서 어떤 실수를 했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인지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진료 기록지와 함께 나의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혹시나 모를 ‘어떤 일’을 대비해서 미리 증거자료를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있었던 일을 정확히 듣고 싶어서였다.




  늦은 밤, 나는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오후 3시 50분 수술 요청.

  오후 3시 55분 수술 동의서에 서명.

  오후 4시 15분 수술실 입실.

  오후 4시 43분 출산.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때에도 모모는 아직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도대체 모모는 언제 내려와서 다시 꺼내기 힘들 만큼 산도에 끼여있었던 걸까.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도 한참을  진통을 했다고 느낀  너무 힘들어서  시간이 길게 느껴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20 후에나 수술실에 들어갔던 거였다.  기억으로는 수술실에 들어간 이후엔 모모의 위치를 재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20,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고도 마취까지 10. 모모가 내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응급수술에 소요된  시간이, 과연 적절하긴  건가? 그리고 내가 30분만  텼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다음 날 점심시간, 우리 부부는 의사 선생님의 방으로 갔다. 총무과장분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첩을 꺼냈다. 어젯밤 밤을 새우며 적어 놓은 질문들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울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수첩 맨 윗 줄에 가장 크게 적어둔 질문을 했다.


  "제가 그때 수술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의사 선생님의 눈에서 아주 잠깐 동안, 나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곧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산모님. 산모님이 수술해 달라고 했어도, 의사가 판단했을 때 더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면 안 했을 겁니다. 산모님이 먼저 수술 얘기를 꺼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힘드신 것 같은데, 그때 태아 호흡도 불안정하고 더 시간을 끌면 산모분도 태아도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서 수술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만삭아로 건강하게 태어날 모모를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에게, 단순히 겉치레에 불과한 말이언정 처음으로 위로를 건넨 이는, 나의 가족이 아니라 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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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북 "망가진 인형"에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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