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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Jan 23. 2024

글자가 전하는 목소리

글꼴을 이용한 브랜드텔링

언어는 시각적 인상에 사로잡혀 있다.  
무언가를 비교할 때 시각적 인상에 기대고
시각에 의지하여 행동이나 기분을 설명한다.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1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실크로드를 거쳐 12세기에 유럽에 전해진다. 12세기 중세 유럽은 종교와 귀족 중심의 신권 사회였기에 종교 문서와 공문서를 필두로 가치 있는 글들을 양피지에 필사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필사는 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성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 의지를 다 해서 기록하였고 그 수준은 가히 예술작품의 경지였다.

필사하는 중세의 수도승


1445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과 양피지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저렴한 종이가 인쇄술을 급격히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수도사의 손으로 양피지에 쓰였던 신의 소리를 종이에 활자를 찍어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활자는 초기에 수도사의 필사체를 닮으려고 노력했고(Blackletter) 수학이 발달하면서 수학적 계산으로 정교해졌으며(DIDONE)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강렬하고 두꺼운 모습이 되기도(Slab-Serif, Serif) 하였다.


서체종류의 역사 | 자료 발췌 - https://blog.spoongraphics.co.uk/articles/a-history-of-typeface-styles-type-class


그렇게 활자는 시대를 담고 만든 사람을 닮아갔다. 글꼴을 font face라고 하는 이유는 글자도 사람의 얼굴처럼 보는 사람에게 느낌을 주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각 글꼴은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 어떤 글꼴은 굵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떤 글꼴은 얇지만 스마트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글꼴 하나에 목소리 하나...

그러므로 글꼴을 사용할 때 신중해야 한다. 만일 브랜드의 성향에 맞지 않는 목소리의 글꼴을 선택한다면 브랜드의 성향이 왜곡될 수 있고, 글꼴이 여러 개면 목소리도 여러 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가자 헤어비스는 1972년 국내 최초 브랜드샵 ‘이가자 미용실’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2002년엔 ‘이가자 헤어비스’라는 브랜드명으로 변경했다. 헤어비스의 ‘비스 bis’는 프랑스어로 ‘둘, 두 번째, 다시’의 의미로 헤어를 포함하여 화장품, 교육, 웨딩 등 둘 이상의 프리미엄 가치를 가진 토털 뷰티 브랜드로 거듭난다는 의미라 한다.


브랜드명에 비즈니스에 대한 컨셉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효율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가 쉽게 알아듣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엔 의미가 조금 복잡한 감이 있다. 거기에 이가자 헤어비스의 로고에 사용된 글꼴이 총 세 가지이니 느낌이 다른 글자의 목소리 또한 세 가지가 된다.


어려운 이야기를 세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해 못 하는 말로 세 사람이 동시에 얘기하면 산만하고 시끄럽다. 시각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인다. (2024년 현재 ‘이가자’라는 이름만으로 로고가 변경된 상태)


같은 업종, 비슷한 컨셉을 가진 브랜드 중 이와는 다른 사례가 있다.
영국의 토니 앤 가이 Tony &  Guy는 1963년 런던 남부의 “Clapham”에 살롱 개점을 시작으로 전 세계 41개국에 402개의 헤어 살롱을 두고 있다. 토니 앤 가이의 로고는 워드마크(wordmark : 브랜드 이름 자체를 레터링 한 것) 형태로 태그라인(Tagline)은 ‘HAIRDRESSING’ 이다. 토니 앤 가이가 무슨 브랜드인지를 심플하게 보여준다. 1770년에 사용되기 시작한 hairdresser란 단어는 hair(머리카락)와 dresser(의상 담당자)의 합성어이다. hair를 fashion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후 1771년 ‘HAIRDRESSING’이라는 단어가 파생된다. 굳이 전술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태그라인만으로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다.

토니 앤 가이의 로고는 푸투라 Futura의 패밀리 글꼴을 사용하고 있다. 메인로고는 Futura Extra Bold, 아래의 태그라인은 Futura Light 서체이다.

마치 연설을 할 때와 같이 강조하기도 하고 차분하게 숨죽이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각으로 인지된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 반대로 글로 표현된 내용의 느낌으로 기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글을 읽을 때 느낌과 기억을 연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글을 이용한 브랜드텔링은 브랜드가 전하는 메시지(정신 혹은 콘셉트)를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기억에 남겨야 한다. 그리고, 브랜드만의 성향과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글꼴로 글자의 강약을 잘 조절하여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브랜드를 쉽게 연상할 수 있게 된다. 내용에 더해 글꼴은 형태와 색상으로 목소리의 톤, 말의 어조와 어세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도록 표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영국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주 애닉(Alnwick)에 Barter Books라는 중고 서점에서 오래된 포스터 하나가 발견된다. 강렬한 붉은색 바탕에 선명한 하얀색의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가 담긴 포스터였다.

‘KEEP CALM AND CARRY ON | 차분하게 하던 일을 하라.’


1930년대 말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전 유럽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일본의 가세로 전쟁의 기운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었다. 반대편의 중심에 있던 영국의 조지 6세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히틀러의 야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39년 9월 3일 2차 세계 대전 참여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연설을 하게 된다. 왕의 차분한 연설은 영국 국민에게 라디오를 통해 가슴으로 전해진다. 이때 왕실의 이름으로 포스터도 함께 배포된다. 전쟁으로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용기를 주고 승리의 신념을 가지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포스터는 배포되지 않고 모두 펄프로 만들어졌다 한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포스터는 60여 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발견되어 한 장의 사본으로 남아 조지 6 세왕의 어눌하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포스터는 영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그려진 조지 6세의 튜더 왕관(Tudor Crown)과 길 산스(Gill Sans) 글꼴의 ‘KEEP CALM AND CARRY ON’이 대문자로 쓰여 중앙 정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산세리프(San Serif : 획의 삐침이 없는 글씨체)로 이루어진 글은 단단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이 포스터에 글은 꼭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위엄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드러움을 가진 목소리로 ‘다들 차분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포스터에 사용된 길 산스 글꼴은 영국 태생의 조각가 에릭 길(Eric Gill)이 산세리프의 기하학적 기본 골격과 세리프의 리듬감 있는 비례를 조화롭게 적용해 디자인한 서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아온 세리프의 유려함과 산업화의 기운으로 태어난 강렬하고 투박한 산세리프가 모두 담겨 신뢰감에 ‘부드러운 위엄’이 더해진다.


(좌)’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와 길 산스 서체 디자인


왕실 저작권(Crown copyright)이 만료됨에 따라 이 포스터의 디자인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제품에 디자인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각종 패러디 포스터로 재탄생한다. 디자인으로 혹은 패러디로 쓰이며 포스터의 디자인이 사랑받은 이유는 어려서부터 말을 더듬어 형인 에드워드 8세 왕자보다 사랑받지 못했던 조지 6 세왕이 2차 대전 중 독일의 숱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버킹엄 궁을 지키며 국민과 함께 차분하게 하던 일을 함께했던 그래서 국민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양피지에 신의 목소리를 담았던 글자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사람들의 성품만큼이나 다양한 글꼴들이 탄생한다.
넘쳐 나는 브랜드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글자는 이제 질적인 진화를 하고 있다. 섬세하고 세심하게 조절되고 잘 만들어진 글꼴이 출연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브랜드만을 위한 글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기억과 연상을 통해 떠올릴 수 있는
브랜드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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