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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바하 Jan 05. 2024

보은은 그만해

#나의집사가되어줄래

천둥번개가 치고,
사나운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습니다.


이미 온기를 잃은 어머니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던 그때, 멀리서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누군가가 차박차박 물을 튀기며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춥지. 떨고 있는 것 좀 봐. 낮은 울림과 함께 눈앞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더니 따뜻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덮어왔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커다란 손. 푹 젖은 내 얼굴을 다부지게 잡고 차가운 빗물을 걷어내는 그 동작에 나는 그만 내 마지막 남은 긴장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깜빡이는 시야로 빗물 같은 것에 물든, 어쩐지 나를 살피는 듯한 한 쌍의 짙은 눈동자가 보였습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건 천사일까, 사람일까. 입김이 새어 나오는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속삭였습니다.

“나랑 같이 가자.”

간지럽고 따뜻한 입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저릿한 살냄새. 그렇게 그녀와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바라키엘.


세례명으로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늘을 호령하는 대천사, 그중에서도 번개와 구름의 천사로 알려진 바라키엘은 특히나 수녀의 세례명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천둥번개가 번쩍이던 밤에 바라를 처음 만난 내 입장에선, 바라키엘보다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듯합니다.

바라키엘. 바라ㅡ키엘. 줄여서 바라.

나는 바라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 봅니다. 바라.

바라야ㅡ 나 있잖아. 너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어. 들어볼래?


내가 바라를 따라 이곳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 바라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취미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매번 꼭 같은 시간에 곤히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일어나. 너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니?

바삐 움직이던 햇살이 한껏 게을러지고 길어진 나무 그림자가 안락한 휴식을 담보해 주는 시간, 하필이면 이 소중한 낮잠 시간에 말입니다. 처음엔 잠을 깨우는 바라의 행동에 몹시 화딱지가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렴풋이 의미를 알게 된 후엔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궁금해졌죠. 하지만 호기심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았고… 이젠 그저 그게 뭔들… 흔들리는 몸을 바라의 손에 내맡긴 채 한쪽 눈만 떠 저 장난스러운 바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내 뚱한 반응에도 바라는 아랑곳 않고 이젠 아예 내 앞에 주저앉더니 내 목덜미를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갸르릉. 인정하긴 싫은데, 귀찮은 것과는 별개로 바라의 두꺼운 손가락 마디가 근육을 문지르는 게 기분이 좋습니다. 바라야ㅡ 잠결에 갸르릉 거리며 말합니다. 바라야, 제발ㅡ 그냥 내가 잠들어 있을 땐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주길 바라. 어젯밤에 너한테 선물 주려고 담벼락을 세 바퀴나 달려서 몹시 고단… 아, 혹시 아침에 내가 네 방문 앞에 가져다 둔 선물 봤어? 어제 갓 잡은, 그것도 꽤나 큰 회색 쥐 말이야. 발바닥은 네가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골랐는데, 맘에 들어? 바라의 손이 어쩐지 멈칫합니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나는 샛노란 눈동자와 윤기 흐르는 짧은 털을 지닌, 아름다운 검은 고양이입니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구나!

우리 수도원 방문자들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때 흔하게 던지는 경탄 중 하나입니다. 사료를 먹는 내 모습이 귀여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시선 강탈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목조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늘 경탄합니다. 할짝할짝. 귀여워. 경계심을 담아 그들을 흘끔거리자 이번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릴 관찰하는 거니? 우리가 마음에 들어?"

경계 가득한 시선이었는데, 마음에 드냐니… 바보인 걸까요? 흠. 하지만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합니다. 왜 나는 호기심이 많을까요? 왜 나는 모든 사물을 쉼 없이 관찰하고 경계할까요? 우유를 할짝이며 숙고하는데, 목조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끼긱 소리를 내며 삐그덕 거리는 의자에서 일어섰습니다. 넷 중 가장 작고 경계심이 없어 보이고 시끄러운 사람입니다.

쿵.

그가 엎어질 듯 성급하게 내게 한걸음 쿵 내딛자 순식간에 털이 쭈뼛 섭니다. 쿵, 쿵. 조심성 없는 걸음 소리에 맞춰 점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쿵, 쿵, 쿵! 마침내 나는 냥!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쏜살같이 문 밖으로 튀어나갑니다.

무서워서였군요. 내가 사람들을 쉼 없이 관찰하고 경계한 이유. 그래요, 그건 무서워서였습니다.

나는 관찰합니다. 누가 달려들더라도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갑자기 버려져도 상처받지 않도록.

비 오는 날 허망하게 내 곁을 떠난 어머니는 내게 명징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건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요. 바라를 향한 나의 보은 역시ㅡ나는 바라에게 틈만 나면 열심히 쥐를 잡아다 주고 있습니다ㅡ 내가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는 수단일 겁니다. 우리 고양이들은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해 빚을 지는 순간부터 은인의 주변을 맴돌게 되거든요. 나는 꾸준히 보은 하며 준비합니다. 더 이상 은인의 주변을 맴돌지 않을 수 있도록. 바라와 내가 언젠가 잘 헤어질 수 있도록.

그럼 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고요?

글쎄요. 흠.

헤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천둥번개가 치던 그 밤, 바라의 품 안에서 기절한 채 수도원의 돌문을 넘어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ㅡ다고 합니다. 눈꺼풀이 무거워 햇살과 다투듯 눈을 찡그리는데, 흐릿한 시야에 어쩐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짙은 눈동자가 잡혔죠. 마치 나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순간에 그 눈동자가 내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 세상이 크게 한 번 출렁이고, 마침내 정신이 또렷해진 그 순간... 나는 그만 너무 놀라서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누구냐 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서는 내게 짙은 눈의 상대방은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는데, 그 경쾌한 웃음에 맞춰 그녀가 입고 있던 회색빛의 얇은 옷자락이 찰랑찰랑 흔들거렸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던 밤의 그녀, 바라였습니다.

“살아났네? 운동신경 좋고, 목청 좋고, 텐션 좋고. 이제 밥 먹을까?”

첫 만남에 바라를 천사로 오인한 게 민망할 정도로, 그녀는 오히려 짓궂은 악동 같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바라의 친구들 역시 바라를 마냥 천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듯했습니다. 그 반대의 무언가라면 모를까.

수도원 구석에서 쑥덕쑥덕 오가는 이야기를 종합해 본 바, 바라는 다섯 살 때 수녀원에 버려져 이곳에서 쭉 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을 사랑하는 지극한 신심과 달리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생정신이 부족한 게 바라가 지닌 수도자로서의 한계라고 했습니다.

사랑, 믿음, 희생... 그게 다 뭘까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수도원의 수많은 방과 노랫말을 채우는 저 단어들은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바라에게 넘치고도 부족하다는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치 사냥감을 쫓듯, 나는 단어를 쫓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해가 뜨기 전에 바라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막 방을 나서는 바라의 치맛자락에 머리를 비비며 묻습니다.


ㅡ바라야, 사랑이 뭐야?

빠른 걸음으로 서재로 들어와 제법 진지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바라의 시선을 가로채기 위해 책상 위로 날아오르며 묻습니다.

ㅡ바라야, 믿음이 뭐야?

바라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던 바라의 손을 밀어내고 그 위에 자리를 잡은 채 바라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질문을 준비합니다. 배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꼭 옥장판… 아니 작은 난로 같아서 기분이 좋아 갸르릉 소리를 내며 묻습니다.

ㅡ바라야, 희생이 뭐야?

사실, 희생이 뭔지는 대충 압니다. 다른 수녀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네들에 따르면, 희생이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내가 가진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땐 아마 갓 잡은 쥐 같은 걸 포기하는 건가 보다 했는데, 그네들은 그보다 더한 ‘목숨‘을 거론했습니다. 상대를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것. 신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했다고요. 흠. 그렇다면 우리 어머니가 비 오던 밤에 죽은 것도 희생의 일종일까요? 그런 게 희생이라면 바라야,

ㅡ나는 희생정신이 부족한 네가 좋아.

바라의 검지 손가락을 할짝이며 당부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희생돼서 사라지지 마.



바라는 과연 믿음이 부족한 사람답게, 어디론가 떠날 때 커다란 배낭을 꺼내와 잔뜩 짐을 챙겼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언제나 채워주실 것입니다' 따위의 배부른 말을 내뱉으며 빈 손으로 길을 떠나는 다른 수녀들과 달리, 그녀는 항상 배고픈 사람처럼 쉼 없이 계산하고, 움직이고, 챙겼습니다. 대부분 생존을 위해 필요한 밥그릇, 휴지, 구급약품 따위였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옷가지와 여분의 먹이들도 잔뜩 넣었습니다.

“이것도 챙기자.”

그것도 딱 내 것까지 두 쌍을.

이미 터질 것 같은 배낭에 내 밥그릇과 세 종류의 사료를 꾸역꾸역 넣던 바라는, 급기야는 캣닙을 넣을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짐을 꺼내어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길 여러 차례. 역시나 가방은 닫히지 않았고, 짐을 살펴보던 바라는 급기야 자신의 옷가지 하나를 꺼내 빼 내려놓았습니다. 이건 분명…

ㅡ희생하지 마라냥!

그네들이 말하던 그 '희생' 이었습니다.

ㅡ나를 위해 희생하지 마! 내가 더 빚을 지게 하지 마! 고양이의 선을 넘지 마!

바라는 냐옹냐옹 울부짖으며 옷가지를 물고 바라에게 도로 내미는 나에게 예의 그 경쾌한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더니 내 머리를 푹 쓸어내렸다가 옷을 그대로 바닥에 두고는 가방을 닫았습니다.

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토록이나 계산적이라고 동료들의 질타를 받아오던 그녀가, 나를 위해 옷가지를 포기하다니?

하지만 돌이켜 보니, 바라가 내 밥그릇을 챙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이미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의 만남부터 선을 넘네 마네를 주장하기엔 한참이나 그른 출발점이었음을 깨달았죠. 갑자기 세상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며 캄캄해졌습니다. 심장이 내려앉고 감각이 마비되고 이전의 부채감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마음에 뭉쳐 그 형태를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쳐 수도원 밖으로 튀어나갔습니다.

도대체 이 울적하다 못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무겁고도 진지한 감정은 뭘까요? 왜인지 서럽고 눈물이 나는 이 감정은 뭐란 말입니까? 몇 날 며칠을 밤낮으로 방황하다가 내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을 때, 날 맞이한 건 어딘지 여윈 바라의 품이었습니다. 나는 힘없이 바라의 품에서 내려와 방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밥을 잘 먹지 않기 시작했고, 좋아하던 쥐사냥도 나가지 않았으며, 창밖으로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어나. 너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그간 무력해진 내 눈치를 본 것인지 아니면 제 할 일로 바빴던 것인지 한동안 잠잠하던 바라는, 번개 모양의 돌 분수대 곁에 누워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며 예의 그 익숙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서글픔을 넘어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나는 캭 소리를 내며 외쳤습니다. 뭐가 되긴 뭐가 돼! 어른 미묘가 되겠지!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자 그녀는 무안한 듯 잠시 주춤했지만 짓궂은 악동처럼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서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순간 코끝에 바라의 저릿한 살냄새가 확 감겨왔습니다. 그리고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습니다.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의외의 대답에 귀를 쫑긋 세운 채 바라의 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자리한 샛노란 눈동자가 반짝였습니다. 분수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뽕뽕뽕 하고 우리 사이를 울렸습니다. 곧 그녀가 답지 않게 쑥스러운 듯 고개를 빼며 웅얼거렸습니다. 이게 엄마들이 하는 잔소리라더라. 필수 잔소리. 너는 엄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잖아. 나도 그렇고. 살면서 이 말이 꼭 들어보고 싶었거든.

그때 바라 뒤로 거대한 뭉게구름이 가득 펼쳐졌습니다. 그것도 빛으로 가득 차 온몸이 환하게 빛나는 뭉게구름이. 뭉게구름은 몽글몽글한 회색 뭉치에서부터 시작해 하얗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은 몸통을 지나 흐릿한 머리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이 꼭 기척을 숨긴 채 그림자처럼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저렇게 환하게 빛나는 그녀 같았습니다.

바라야ㅡ 너는 알까? 너의 뒷모습에선 기척 없는 수리새의 서늘함이, 너의 앞모습에선 팔랑거리는 나비의 보드라움이 느껴져. 날 향해 내밀어지는 너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내밀면, 나도 너와 함께 나비가 돼.

바라야ㅡ 너는 알까?

나는 너를… 나는 너를… 나는 네가, 내게서 손을 거둬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네가 이제… 무서워.



나는 궁금합니다. 바라는 나를 언제 버릴지.
가장 연약해진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내칠지.

감정을 깨달아버린 나는 내 마음을 흘려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호의의 감정을 열어둔 것, 애교 많은 아기 미묘가 되어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은 것은 꽤나 유쾌한 일이었죠. 그렇게 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습니다. 바라의 손길은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바라에게 나약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든 자유롭게 바라를 떠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감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요. 그때 내가 바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지 마.

그런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 찬란한 감정의 대서사시를 쓰고 있는 동안, 바라는 누군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청하고 맹세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녀가 지극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이.

그건 신이었습니다.

미열이 올라 바라의 손길이 간절했던 어느 날, 나는 바라가 보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는 금지된 예배당 안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고 말았습니다. 붉은 카펫 위에 곧게 서서한 손에 금색 잔을 든 채 엄숙하고 성스러운 목소리로 무언가를 읊조리는 바라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잔에 든 무언가를 꺼내어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동그랗고 얇고 고소한 향이 나는 것을.

…그건 먹이였습니다. 바라가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던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했잖아. 희생정신이 부족하다고 했잖아. 계산적이라면서. 나한테만 잘해주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저들에게도 먹이를 줘?

곧 폭풍우 치는 마음속에서 신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줄지어 먹이를 받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피어올랐습니다.

바라야ㅡ 나 지금 심정이 너무 복잡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아팠으면 좋겠어. 나 없이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못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나에게서 멀어졌으면 좋겠다가도,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바라야, 네가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날 밤, 나는 바라의 문 앞에 물고 있던 쥐를 가만히 내려놓고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서글프고 울적한 마음과 달리, 방문을 열고 들어가 곤히 자는 바라를 깨우며 물어봐주고 싶었거든요. 일어나라고, 너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고.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너에게 얼마든지…

바라야ㅡ 그러니까 나한테서 멀어지지 마.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에게 청합니다.

바라야ㅡ 나 있잖아. 너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어. 들어볼래?

앞으로 신의 집을 지키는 집사 말고, 나를 지키는 집사해라. 대충 들어보니 신이란 건 널 넘치도록 사랑해 주는 존재라며. 네가 바라는 사랑을 내가 줄게. 내가 매일 밤 곤히 자는 너를 발로 꾹꾹 눌러 깨우며 “일어나, 너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하고 물어봐줄게.

내가 너의 신이 될게.

이제 보은은 그만할 거야. 애초에 나한테 부채감을 청산할 방법이란 건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빚 다 받을 때까지 쭉 내 곁에 있어.

그러니까, 나의 집사가 되어줄래?



(Cover: John Constable <Cloud study: Stormy sunset> (18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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