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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여행자 수지 Oct 11. 2024

나의 해방일지

다시, 자유가 되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나 충격을 받으면 그때의 사건들을 기억에서 지운다고 한다.

살기 위한 메커니즘 같은 거라고 한다.

나는 과거에 겪었던 많은 일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남아 있는데

그게 단순히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 메커니즘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겪었던 나의 망한 연애담을 풀어볼까 한다.


...


“걸레 같은 년”

“너 나랑 헤어지면 섹스 동영상 내가 다 풀어 버린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근무시간 중 남자 손님에게 조금만 말을 섞어도 그 새끼에게 관심 있냐고 나를 몰아세웠고

비행학교에서 실습교육을 받고 집에 온 날에는 어김없이 교관이랑 자고 왔냐며 나를 모함했다.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범벅이 된 나의 자존감은 하루하루 낮아져 갔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이 새끼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바로 도망가야지’

‘영주권만 받으면 떠난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캐나다에 도착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즈음 그를 만났다.

그는 친누나 부부와 함께 서스캐처원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식당과 펍이 딸린 모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밴쿠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지원한 곳 중에 하나가 그의 모텔이었고,

그의 처형과 연락이 닿아 식당에서 서버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구가 천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젊은 한국 남녀가 만났으니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일.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호감은 자연스레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경 1km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같은 장소에 살고 같은 장소로 출근하며 일상을 보냈다.

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 외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갔다. 


...


그는 집안의 귀한 막내아들로 자라서 그런지

나이가 서른이 훌쩍 지났는데도 나이 드신 부모님이 종종 와서 집청소를 해주고 가곤 했다.

20대 초반 부모님이 사준 차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걸린 적이 있었고

하루에 담배를 한 갑 이상 폈고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두 시간을 운전해 카지노에 가서 밤을 새우고 왔다.

나보다 6살 많았지만 조선시대에서 온 듯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 잘하고 자식을 잘 돌봐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비행교육을 받겠다고 했을 때 반쯤 비웃었고 반쯤 싫어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일 잘하는 직원이 스케줄 조정을 요구하니 귀찮았을 테고

자기 연인이 파일럿을 하겠다고 하니 자존심에 상처도 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작은 시골에서 온전히 나를 통제하던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요소가 생겼으니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행 교육을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 혼자 시내에 나갔다 온 날이면 그의 폭언은 더욱 심했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작은 동네에서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었다

가족에게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귀한 둘째 딸이 낯선 타국 땅에서 유일하게 믿고 기댈 남자친구한테 이런 대접을 받는 걸 알게 된다면 부모님은 피눈물을 흘리실 게 뻔하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 나의 단짝 친구가 당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서 혼술을 하며 그녀와 영상통화를 하는 게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


그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렇게 미련하게 버텼는지도 모른다.

그가 바뀌면 좋겠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헤어져야만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파일럿이 되려면 영주권이 필요했다.

영주권을 받으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은 이 가게에서 더 근무해야 했다.

비행 교육을 마치려면 돈도 필요했다.

당시 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받은 팁을 모아 비행교육에 필요한 돈을 차근차근 모으고 있었다.

아직 자격증 공부도 더 해야 했다.

그래, 딱 2년만 더 버티자.

영주권 받고 CPL자격증 따고 만불 정도만 더 모으면 그때 바로 밴쿠버로 떠나자.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 수지야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하루 일과

오전 8시, 기상

오전 8시 30분, 헬스장에서 운동

오전 11시 30분, 출근 (식당 or 펍)

(근무 중 한가한 시간에 틈틈이 비행 공부)

저녁 9시 30분, 퇴근

저녁 10시~12시, 비행 공부

저녁 1시, 취침


쉬는 날에는 비행학교에 가서 실습 교육을 받았다.

학교는 200km가 넘는 거리에 있었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 동네

나는 동네에서 가장 싼 중고차를 200만 원에 구입했다.

수동 조작을 해야 했고 물에 잠긴 적이 있는 검은색 티뷰론 스포츠카

타이어가 다 닳아서 블랙 아이스에 컨트롤을 잃기도 했고

비 오는 날 커브길에서 미끄러져 두 바퀴를 돌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내 생애 첫 차

나는 2시간을 운전해 학교에 갔고

2시간의 비행교육을 받고

또다시 2시간 운전해 집에 오는 일과를 반복했다.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 나리라,라는 희망을 가지고



2016년 3월, 드디어 영주권이 나왔다.

9월, CPL 비행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나는 그 새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다시, 자유가 되었다.



...


가끔 리자이나 공항으로 비행을 갈 때가 있다.

내가 첫 비행을 배웠던 그 공항

그때는 공항 관제사가 어찌나 무섭던지 교신을 하기 전에 마이크 버튼을 못 누르고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면 서스캐처원에서 지낸 4년 여의 기억이 오버랩되며 감회가 새롭다.

우연에 일치인지 머무는 호텔이 그와 자주 가던 카지노 바로 건너편이다.

Regina Casino

좋지 않은 기억에도 추억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이곳은 나에게 추억의 장소이다.

우리는 쉬는 날 리자이나에 가서 장을 보고 저녁을 먹고 집에 오고는 했는데 저녁을 먹고 나면 그는 꼭 카지노에 가고 싶어 했다.

카지노에 가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카지노를 떠나기 일쑤였다.

집에 가자고 조르는 나에게 그는 백 불을 손에 쥐어주며 가서 슬롯머신을 하라고 내 등을 떠밀고는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카지노에서 그를 기다리던 나는 비행수첩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고

그가 게임을 하러 자리를 떠나면 나는 카지노 안 카페테리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비행공부를 하곤 했다.

그에게서 받은 백 불은 야무지게 주머니에 챙겼다.


그가 그의 행운을 시험하던 곳

내가 나의 미래를 준비하던 곳

리자이나 카지노는 나에게 평생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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