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많은 F는 오늘도 T가 되어 비행을 간다.
비행교관으로 경력을 쌓은 나는 2020년 1월에 화물을 운송하는 항공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 앞섰다.
비행교관을 할 때는 4인승의 작은 비행기를 조종했고 지금까지 모든 비행은 그 비행기 안에서 쌓은 경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타게 될 비행기는 승객을 19명 정도 태울 수 있는 제법 큰 비행기였고 비행기 엔진과 프로펠러가 두 개 달린 쌍발 터보프롭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날씨가 좋은 날에만 비행기를 몰았다면(시계비행), 이제는 날씨가 안 좋아도 구름 속에서 비행기 계기판에 의존해 비행을 해야 한다. (계기비행) 새로운 회사에 빠르게 적응하고 무엇보다 낯선 비행기를 짧은 시간 내에 배워서 조종할 줄 알아야 한다. 회사에서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비행기 기종시험을 봐서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비행에 투입되어 일을 시작한다.
파일럿의 레벨업은 항상 숨이 턱턱 막힌다.
단기간 내에 무지막지한 양의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두 발로 선 아이에게 ‘자, 이제 두 발로 섰으니 힘껏 뛰어야지!’ 하는 느낌
2020년 1월 10일부터 5일 동안 이론 교육을 받고 21일부터 5번의 비행 교육을 받았다.
29일 비행기 기종시험을 통과하고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나는 주로 야간 근무를 배정받았는데 저녁 10시에 밴쿠버 공항에서 이륙해 약 2시간의 비행을 한 뒤 캘거리 공항에 도착한다. 캘거리 공항에서 택배 상자를 비행기에 싣고 다시 약 2시간 반 정도 비행해 빅토리아 공항으로 가 택배를 내려주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면 하루의 일정이 끝난다. 새벽 4시 퇴근
나는 8시 50분경 회사에 출근을 한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회사 사무실 문을 연다. 불을 켜고 컴퓨터로 날씨와 공지사항, 비행계획서(flight plan)를 인쇄할 때쯤 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기장은 격납고에 가서 비행기 점검을 한다. 점검을 하고 돌아오면 같이 앉아 날씨와 공지사항 등을 확인하고 비행하는데 특이사항은 없는지 간단히 브리핑을 하고 비행을 간다. 상황에 따라 비행기 점검과 서류 준비 작업을 누가 하는지 역할이 바뀔 수는 있지만 기장과 부기장이 함께 임무를 나눠서 비행 준비를 마친다.
파일럿에게 팀워크는 매우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이다.
기종시험을 통과하고 막 비행에 투입되던 시절, 나는 20대 중반의 젊은 기장과 자주 비행을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항공대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 2년 동안 시골에서 비행경력을 쌓았고 그 뒤 이 회사에 입사해서 기장이 되었다. 20대 싱글 남자답게 외모와 몸을 키우는 데 관심이 많았고 스포츠카를 몰았고 여름에는 모터사이클을 탔고 다운타운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비행기 조종 감각과 운동신경이 좋았고, 상황판단능력도 빨라 칵핏 안에서 늘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쳤다. 전반적으로 그는 영리하고 능력 있는 파일럿이었다.
그런 기장과 같이 비행해서 좋았겠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대신 그 덕분에 좋은 파일럿의 자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비행 출발 1시간 전이 회사에서 정한 출근 시간이다. (체크인)
먼저 도착한 내가 비행계획서를 인쇄하고, 비행기 점검을 하고, 비행 준비를 모두 다 마치고 점점 초조해질 때쯤 그가 나타난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브리핑 없이 바로 비행을 간다. 이륙을 하자마자 핸드폰으로 다운로드해온 영화를 보거나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짐을 비행기에 실어야 할 때면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일이 다 끝나갈 때쯤 나타난다. 일분이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계기비행을 취소하고 가장 가까운 런웨이를 선택한다.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갓 배우는 시기에 그가 내 첫 비행 파트너라는 점은 나에게 큰 문제였다.
당시 나는 비행기 조종도 미숙하고 회사의 루트나 공항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당연히 비행을 갈 때 자신이 없고 그렇기에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로 성실히 임한다. 이럴 때 대부분의 기장은 옆에서 경험과 지식을 나누며 새로 온 파일럿을 이끌어서 잘 적응하게 돕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 기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 근무태만의 전형적인 모습. 하지만 나는 ‘내가 미숙하니까....’라는 생각으로 그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한 번은 내가 조종을 해 캘거리 공항에 가는 중이었는데 한 번도 쓰지 않은 활주로를 배정받았다. 야간비행이라 공항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 나는 IFR 어프로치를 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저기 공항 있잖아, 내가 가이드해줄게’ 라며 나의 동의를 얻지 않고 관제사에게 IFR어프로치에서 비주얼 어프로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IFR 어프로치는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게 준비할 충분한 거리와 시간을 파일럿에게 주는 반면, 비주얼 어프로치는 파일럿이 비행기와 활주로의 거리 및 고도를 기준 삼아 비행기 착륙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활주로의 위치를 빨리 파악하는 게 안정적인 착륙준비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결국 나는 활주로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착륙 직전까지 고도와 속도를 잘 컨트롤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서 주눅 들게 되었다. 당연히 그와의 비행이 즐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상처를 받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건 파일럿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게 아닌가? 나 엿 먹으라고 일부러 머리 살살 굴리면서 늦게 오는 건가? 이렇게 생각을 하니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행을 하다가 그가 나의 실수를 지적하거나 피드백을 줄 때도 ‘기본도 안 돼있는 새끼가...’라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라고 느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 그의 행동이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길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말을 하지?
고민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처음부터 선을 딱 그었다면,
처음부터 그의 잘못된 행동에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먼저 나는 로봇이 되기로 했다.
그가 내 실수를 지적한다면 받아들이되 절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그리고 그가 한 실수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감정을 싹 빼고 현상을 보고하기로.
나는 로봇이다..
나는 로봇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냈다.
비행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가기 전 그에게 말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말할 때 눈물부터 나는 내 성격상 이런 대화는 너무 어렵다. 하지만 나는 로봇이니까 말할 수 있다.
나는 로봇이다...
나는 로봇이다...
“나는 네가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와서 함께 비행 전 업무를 하면 좋겠어”
“나는 우리가 비행 가기 전에 오늘 비행에 대한 전반적인 대화를 했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조종간을 잡았을 때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면 좋겠어”
그의 근무태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부기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에게 퇴사경고를 준 상황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대화를 마치고 그는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 뒤로 그는 출근 시간에 늦지 않았다.
늦으면 사정을 말하고 사과를 했다.
그 후로 나는 비행을 할 때 항상 로봇의 자세로 임한다
보면 말한다. 말은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뒤에 그 아래 숨겨진 의도나 의미 따위는 없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느끼면 말한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말한 뒤에 생각하는 게 낫다.
그러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도 없고 부정적인 감정이 내 안에 누적되지도 않는다.
본능은 대부분 옳다.
그렇게 눈물이 많은 F는
오늘도 T가 되어 비행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