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비행 vs. 시계비행
(31) IFR vs VFR - 비행과 인생을 비교한다면?
사람들은 줄곧 비행과 인생을 비교하곤 한다.
나도 비행을 배우면서 인생을 배웠다.
내가 비행교관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일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핏매도우 공항
새로 배정받은 학생과의 첫 비행이 있는 날인데 하필 비가 올게 뭐람.
날씨 때문에 비행은 갈 수 없지만 대신 앞으로 탈 비행기를 보여 주려고 격납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이 열린 격납고가 있어 잠깐 비를 피할 요량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를 만났다.
흰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빵모자를 눌러쓴 나이가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
그는 그의 소유로 보이는 작은 경비행기를 손질하던 중이었고,
난데없이 빗속에서 튀어나온 우리 둘을 흥미롭게 보았다.
"너네 비 오는 데 여기서 뭐 하니?"
"이 학생이 오늘 나랑 첫 비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거든. 그런데 날씨 때문에 비행을 갈 수가 없잖아. 그래서 앞으로 탈 비행기를 보여 주려고 격납고로 가고 있어."
이렇게 나와 브루스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에어캐나다 보잉 787 기장이었다.
이 빵모자 할아버지가 내 꿈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니...
그에게 물었다.
"아니, 그 멋진 787기를 모는데 왜 여기서 이런 조그마한 피스톤 엔진 비행기를 모는 거야?"
"승객을 태우는 상업용 비행기를 몰 때 나는 자유가 없어.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정해진 경로로, 정해진 고도로, 정해진 속도로 가는 것뿐이야.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몰면 목적지도 내가 정하고, 가는 길에 자연 경치를 즐기려 경로를 이탈해도 되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해변가를 발견하면 내려서 한적한 오후를 만끽할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상업용 비행기를 운행한 경험이 없는 병아리 파일럿이었다.
에어라인 파일럿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의 말을 100%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안다.
비행을 할 때는 보통 두 가지 법 안에서 비행이 이루어진다.
시계비행(VFR)과 계기비행(IFR)
시계비행(VFR)은 바깥을 보면서 길을 찾고 다른 비행기와의 충돌을 스스로 막아야 하는 비행. 따라서 가시거리도 좋아야 하고 구름의 높이도 높아야 한다. 그래야 멀리까지 볼 수 있다.
계기비행(IFR)은 날씨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받기 위해서 비행기의 계기판과 항법장치에 의존해 길을 찾고, 관제사의 도움으로 다른 비행기와의 충돌을 막는다.
상업용 비행, 그러니까 보통 승객이나 화물을 싣고 운행하는 비행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효율적으로 비행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보통 후자인 계기비행의 법을 따라서 운행한다.
예를 들어 인천에서 밴쿠버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대부분 승객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래서 몇 시에 도착하는데?’ 혹은 '그래서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걸리는데?'이다. 따라서 회사에서는 최대한 직선 경로를 선택하고, 비용과 시간적인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고도와 속도를 선택한다. 파일럿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대부분 회사에서 정한 비행계획(flight plan)에 따라 비행기를 운행하면 된다.
계기비행은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간다.
계기비행은 계획을 따른다.
계기비행은 효율적이다.
계기비행은....
재미없다.
사람들은 줄곧 비행과 인생을 비교하곤 한다.
나도 비행을 배우면서 인생을 배웠다.
그런데 비행과 인생이 다 같은 건 아니다.
비행 : 출발 ------------------------ 도착
인생 : 출생 ------------------------ 사망
사람이 태어난 시점을 출발지라 하고 사람이 죽는 시점을 목적지라고 한다면 우리의 목적지를 모두 같다.
죽음
누군가가 미리 정해놓은 길로 목적지까지 간다면 효율적 일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음성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가?
영어에는 'stop and smell the roses along the way'라는 표현이 있다. 잠시 멈춰서 길가에 핀 장미꽃의 향기를 맡으라는 말은 인생을 살면서 삶 곳곳에 펼쳐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즐기라는 뜻이다.
어차피 목적지로 갈 거
가는 중에 흥미로워 보이는 샛길로 새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 닿아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멋진 풍경을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벗을 만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삶을 더욱 다양한 이야기와 추억으로 가득 채우는 게
결국에는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