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여행자 수지 Oct 25. 2024

"She's all yours."

문제 학생을 다루는 방법

“She’s all yours.”


그녀는 내가 비행학교에 교관으로 취직하자마자 나에게 던져진 숙제였다.

학교의 모든 교관들이 두 손 두 발 다 든 학생

“비행은 제법 잘하는데 도무지 영어 시험을 통과 못하네...”

다들 입을 모아 하는 소리였다.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중요한 첫 관문이 교관 없이 혼자서 비행을 나가는 것이다. 이를 솔로비행이라 한다. 첫 솔로비행은 파일럿이 되는데 큰 마일스톤(이정표) 중 하나다.

솔로비행을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항공영어시험이다.

영어시험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전화로 심사관과 10분 정도 영어 대화를 나누면 된다. 이를 통해 학생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지를 본다. 

그녀는 혼자 비행을 가기 충분한 비행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어시험에 계속 떨어져 발목이 묶여 있었다.

학교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 계속 의미 없는 비행수업만 하고 있었다.






2019년 2월 16일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키가 나만큼 컸지만 말라서 마치 대나무 같았다.

얼굴은 계란형보다는 타원형에 가까웠고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에 고무줄로 대충 묶은 검정 머리

얼굴에 핀 빨간 여드름이 사춘기의 절정이라는 걸 대신 말하고 있었다.

헐렁한 무채색의 후드티에 몸을 숨기고 옷소매 끝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말할 때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목소리가 작아 몸을 기울여야 간신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비행 전 브리핑을 마치고 비행기에 탔다.

비행교육을 할 때 타는 비행기는 4인승 자동차를 양쪽에서 꽉 눌러 짜부러트린 뒤 양쪽에 날개와 바닥에 바퀴 세 개를 달아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그녀는 소문대로 비행을 줄곧 잘했다.

체크리스트를 따라 차분하게 비행기를 다루고 이륙부터 착륙까지 내가 조종간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다.

피드백을 받으면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적용했다.

혼자 솔로 비행을 가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옆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에서 집중력과 열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관제사와 라디오로 교신을 할 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비행을 마치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에게 캐나다에 언제 왔는지, 비행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초등학생 때 엄마랑 둘이 중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어렸을 때부터 파일럿이 꿈이었던 딸을 위해 엄마는 악착같이 일해서 번 돈으로 아이를 비행학교에 등록시켰다.

그녀는 그런 엄마를 보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학교에서도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고 수업이 끝나면 비행학교에 와서 비행수업을 받았다.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PPL)을 따 토론토에 있는 항공대에 입학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비행이 문제가 아니다.

결국 자신감이다.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아이가 낯선 외국땅에서 언어장벽을 경험하고 인종차별을 겪으며 자랐다면 더더욱 소심 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취한 특단의 조치

1. 목소리를 높여라

2. 당당한 자세와 눈빛을 가져라

3. 내면 깊숙이 묻어둔 자긍심을 끌어올려라



1. 목소리를 높여라

예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출연자에게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맞추는 퀴즈가 있었다. 그것처럼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그녀가 말할 때마다 “뭐라고? 안 들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씩 높였고, 나는 그녀가 뒤꿈치를 들어 목청껏 소리를 지를 때까지 '뭐라고? 안 들려!'를 반복했다.


2. 당당한 자세와 눈빛을 가져라

어깨를 말고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습, 손으로 옷소매 끝을 잡고 있는 모습,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빛을 회피하는 모습. 이런 몸의 표현들은 자신감이 부족한 걸 보여준다. 나는 그녀에게 후드티 대신 셔츠를 입을 것, 어깨를 피고 허리를 곧추세울 것,  셔츠 소매를 접거나 걷을 것,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할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3. 내면 깊숙이 묻어둔 자긍심을 끌어올려라

자신감 있는 자세, 태도, 말투는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감은 결국 내면에서 바깥으로 표출되는 에너지이다. 따라서 그녀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게 중요했다.

나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는 아마 학교 친구들이랑 비교했을 때 네가 영어도 잘 못하고 문화도 달라서 겉돈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네가 꼭 알아야 하는 게 있어. 너네 반에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백인 여자애가 있다고 치자. 머릿속으로 아무나 한 명을 정해봐. 그 아이는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영어를 잘할 거고 친구들도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커온 친구들이니까 더 편할 거고 학교생활도 어려울 게 없겠지? 지금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교실에 앉아 있지만 그 친구와 너는 지금까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았어. 겉모습에 절대 속으면 안 돼. 반대로 너는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로운 장소에 적응도 해야 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새로운 언어도 배워야 했지? 새로운 난관이 닥칠 때마다 너는 그걸 이겨내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 거야. 얼마나 대단해! 그 친구는 영어 말고 다른 말을 할 줄 알아? 그 친구는 캐나다 말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적 있어? 너는 그걸 다 해내고 더 나아가서 파일럿이 되겠다고 학교 끝나고 여기 와서 나랑 이렇게 비행수업을 하고 있잖아. 너는 정말 대단한 아이야! 나도 알고 다른 선생님들도 알고 우리 학교 전체가 다 알아. 그런데 너만 몰라. 그러면 안 되겠지? 그러니까 앞으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너 스스로를 칭찬해 줘. '너 진짜 특별해! 너 진짜 멋있어! 너 진짜 대단해! 너 진짜 강해!' 이렇게... 알았지? 약속!"



그녀는 그 뒤로 한 달 뒤 영어 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첫 솔로비행을 나갔다.

안전하게 첫 솔로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그 뒤로도 나와 계속 비행수업을 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 원하던 항공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당시 그녀에게 했던 말은 내가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해온 말이다.

나는 처음 비행 당시 캐나다 백인 남자 파일럿을 보면 이유 없이 기가 죽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아는 것도 없고 영어도 못하고 지식도 짧고 실력 없는 파일럿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그때 나의 자긍심을 끌어올려준 사람이 있다.

바로 지금의 내 남편, 테런스다. (당시에는 남자친구였다)

2017년 밴쿠버로 이사해 첫 파일럿 직장을 구할 당시, 나는 캐나다에 있는 모든 항공사에 이력서를 보내놓고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전화 한 통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나의 자존감은 낮아져만 갔고, 무엇보다 모아놓은 돈이 거의 바닥이 나서 더욱 조급해지고 절박해졌다. 



미래가 불안하던 시절

앞이 너무 깜깜해 주저앉고 싶었던 시절

그는 촛불을 켜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갈 수 있게 길을 밝혀 주었다.

덕분에 나는 용기를 냈고,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전진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나는 그가 써준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자신감이 떨어지는 날이면 다시 꺼내서 본다.


On another note, please remember you are beautiful and awesome. But more importantly you out of all need to safeguard this belief yourself. Learn to forgive yourself when you are not perfect and learn to remember you are beautiful and hardworking and in time you will overcome obstacles. I believe in you so much and we will do great things together. Please remember you are loved and safeguard your mind.

Luv yu,

Terrence


또 한 가지, 당신이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을 때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당신이 아름답고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임을 기억하세요. 시간이 지나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정말 믿어요, 그리고 우리는 함께 위대한 일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당신의 마음을 꼭 지키세요.

사랑합니다. 

테런스



이전 06화 로봇과 뺀질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