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열등감 레이다가 있다
‘게이다’라는 말이 있다.
게이와 레이다의 합성어로 게이(동성애자)를 알아볼 수 있는 예민한 레이다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게이다가 있다’라고 한다. 외국에 정착해서 사는 이민자에게도 이런 비슷한 레이다가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인종차별 레이다’ 라고나 할까?
백인 사회에서 동양인으로 살면 종종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요즘에는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다민족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조금 더 미묘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대방의 무지에서 오는 거라면 귀엽게 봐주면 되지만 혐오에서 오는 거라면 기분이 나쁜 건 당연지사.
커피샵에 들어가려는데 백인 여자가 EXIT(출구) 사인이 안 보이냐며 나를 가르치려고 든다면?
고급 레스토랑에 갔는데 목이 좋은 창가 자리와 중앙에는 백인 손님들이 앉아 있고 종업원을 따라서 안내된 구석자리에는 나처럼 생긴 동양인들이 모여있다면?
이걸 인종차별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가끔 나는 헷갈린다.
그러다가도 ‘내가 백인 여자였다면 이런 일을 겪었을까?’라고 생각하면 나의 레이다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란 결론에 이른다.
6년 전 처음으로 ‘파일럿’이라는 타이틀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또 다른 레이다가 있었다. 굳이 이름을 짓자면 열등감 레이다. 이번에는 그 레이다로 인한 나의 실수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캐나다의 에어라인 파일럿 사이에서 유니콘 같은 존재이다.
먼저 나는 여성 파일럿이다.
파일럿이란 직업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직업군에 속했다. 최근 여자 파일럿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해도 전 세계적으로 여자 파일럿의 비율은 평균 5%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대한항공은 2008년에 처음으로 여자 파일럿을 채용했고, 이와 관련된 기사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에 총 3557명의 파일럿이 근무하고 그중 6명이 여성 파일럿이었다.)
또한 나는 여자 파일럿 중에서도 머리가 까만 동양인 파일럿이다. 여기에 만 20세 이후에 스스로 캐나다에 정착한, 한국인 특유의 영어 악센트를 가진 이민 1세대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나는 정말 유니콘이 맞다.
지금은 ‘이민 1세대 동양인 여성 파일럿’이라는 나의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6년 전 처음 비행교관으로 일을 시작했을 당시 경험 없고 불안한 나에게 내가 동양인 여자 파일럿이라는 사실은 나의 열등감 레이다가 너무 민감하게 작동하게 했다.
2018년 1월, 나는 핏매도우 공항에 위치한 한 비행학교에서 비행교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비행교관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곳에서 교관으로 일을 시작했다.
많은 파일럿에게 비행교관은 비행경력을 쌓아 항공사에 입사하기 위한 사회초년생의 일자리이다.
그런데 이 교관이라는 게 참 묘하다.
어제까지는 비행을 배우는 학생이었는데 교관 시험을 통과하면 내일부터는 비행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겠지만 아직 서투르고 준비가 안되었는데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이런 영어 표현도 있지 않은가
Fake it until make it
척해라, 그렇게 될 때까지
처음에는 비행기 조종하랴, 관제사와 교신하랴, 주변 살피랴, 거기에 학생까지 가르쳐야 하니 정신이 없었다.
가르치는 학생의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조금 더 능숙하고 여유로운 교관이 되었다.
교관 생활을 시작한 지 4개월쯤 지났을까. 당시 비행교관의 이직이 잦았던 시절이라 나는 학교의 비행교육을 관장하는 교관장(Chief Flight Instructor) 다음으로 오래된 교관이 되었고, 내 뒤를 이어 새로 교관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2명 더 생겨 학교에는 총 4명의 비행교관이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 한 대가 엔진에 이상이 생겨 정비에 들어갔고, 엔진 내에 있는 부품을 교체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런 경우 테스트 비행을 통해 비행기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비행기를 쓸 수 있다.
그때 나는 교관장(CFI)이 테스트 비행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내가 그 비행을 담당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나보다 더 뒤에 채용된 교관에게 테스트 비행 임무가 돌아갔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귀찮은 일, 대신해줘서 고맙네’라고 오히려 고마워할 일인데, 그때 나에게는 열등감 레이다가 어느 때보다 활발히 돌아가고 있었다. CFI의 지시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비행 학교 운영의 총책임자는 은퇴시기를 훌쩍 넘은 백인 할아버지였는데, 어쩌면 이 결정이 그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더 분개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평소에도 파일럿으로서 나의 자질을 의심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조차 나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이 결정은 파일럿으로서 나는 쟤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받기 충분했다.
자존심에 난 스크래치...
평소의 나라면 그냥 참고 넘어갔을 것이다.
왜?
나는 간절했으니까.
여기에서 내가 목소리를 내고 항의를 하면 아마 학교에서 잘리거나 더 눈 밖에 나겠지.
그러면 월세는 어떻게 내고 또다시 나를 받아줄 곳이 있을까.
이런 생각,
현실적인 생각.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나락으로 떨어져도 나를 받쳐줄 안전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떨어져도 괜찮았다.
테런스.
지금의 남편.
덕분에 처음으로 인생에서 ‘간절하되 비굴해지지는 말자’는 배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 찾아가서 총책임자 얼굴에 대고 항의했고, 그동안 참았던 말을 다 내뱉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
그 뒤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에어라인 파일럿이 되었고 비행 경력도 생겼고 6년 전보다 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열등감 레이다가 잘 작동을 하지 않는다.
아니, 레이다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내 힘으로 스위치를 끌 수 있다.
6년 전 나를 다시 돌아본다.
과연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수지야, 네가 너무 예민했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에겐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파일럿은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상황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안전을 위협하는 비행에 회사에서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상사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
이는 파일럿에게 꼭 필요하다.
그날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던 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이었다.
나를 지켰다는 뿌듯함...
앞으로는 누구도 나를 깎아내리거나 나를 무시하게 놔두지 않으리라.
절대 나를 방치하지 않으리라.
나를 내가 지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