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반드시 그날 쓰고, 끝맺음까지 해야 하는 글이 찾아올 때가 있다. 사실은 글이 아니라 마음이 오는 것이겠지. 뜨개질하다 코를 놓쳐 다 뜯어내야 했던 기억처럼, 지금 다가온 마음의 결을 단단히 잡아매지 않으면 다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가 되어 버릴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기는 날. 나는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다가, 떠오르는 구절을 쓰려고 서재에 들어가 연필을 잡는 행위를 서너 차례 반복 중이다. 나에게 말을 붙이는, 나를 쓰게 만드는, 너는 대체 누구니?
분명, 오늘은 괜찮은 날의 시작이었다.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책을 읽는데 루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모는 큰애가 서울에서 키우는 반려견이다. 추석 연휴에 내려왔다가, 예정에 없던 직장일로 큰애가 급히 올라가며 (대형견이라 아무 비행기에나 태울 수 없는 사정으로) 내게 맡겨졌다. 루모가 내 책상 옆으로 오더니, 자기의 턱을 내 허벅지에 턱 걸친다. 순간, 어? 나의 심연에 자리한 우물에 무언가가 퐁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파문이 일고, 어딘가가 저릿저릿 진동한다.
큰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길래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눈을 마주친다. 아! 세상 모든 존재에게는 ‘쓰다듬’이라는 행위, 어루만지는 마음, 눈 마주침의 순간이 필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건네는 애정과 믿음이란, 반드시 사람이 아니어도 가능한 거구나. 신기한 감각이다. 쓰다듬는 것은 나의 손이고, 어루만져지는 건 루모의 턱과 머리와 등이 확실한데, 되려 내가 살살 쓰다듬어지고 다독다독 어루만져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 울고 싶은 마음은 뭐지? 마지막 월경을 끝낸 지가 3년이 넘어가니 월경 전 증후군은 아니다. 경미한 수준의 허리디스크 증상으로 다리를 절뚝이며 걷고 있고, 물리치료를 받고 있지만 괴로운 수준은 아니다. 이렇게나 기분이 기본값 아래로 내려갈 일은 없는데, ‘쓰다듬고 어루만지다’라는 단어 속에서 나는 소용돌이치는 중이다.
막 스물을 넘길 때였던가, 내 마음의 기본 정조情調는 ‘슬픔’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쳐 외치고 싶은 마음과 나를 꽁꽁 숨기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몰아치던 날들이었다. 그런 날이면 계절과 상관없이 창문을 꾹 닫고, 째깍이는 시계의 건전지를 빼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바깥과 안의 공기가 뒤섞이는 것도, 미세한 소리가 침입하는 것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들.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으면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돤 듯, 단계별로 퍽, 퍽, 몸이 작아지다 손톱만 해져 버리는, 기이하지만 실재하던 감각과 꽤 자주 맞닥뜨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공허였다. 그 공허 속으로 나란 존재가 빠져들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폐의 공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에 정착한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09~110
“루모, 가자.”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보며, 루모는 벌써 현관에서 대기 중이었다. 세상 모든 전봇대가 궁금하고, 같은 종을 만나면 꼬리를 흔들고, 고양이나 새를 만나면 낑낑거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 레포츠 공원 안, 벤치에 앉아 루모를 풀어 주었더니 멀리 가지 않고 내 옆 풀밭에 앉는다. 나를 지켜주는 충직한 개의 콘셉트인가 싶다. 그러면서도 귀를 요리조리 돌리며 들리는 소리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계속 킁킁거리며 주위의 풀냄새, 벌레 냄새를 맡고 있다. 지나가는 모든 사물을 응시한다. 그러다 나뭇가지 하나를 입에 넣더니 질겅거린다. 산책 나온 개를 보면 몸은 바닥에 고정인 채로 꼬리만 프로펠러가 된다. 세상 모든 게 매일 저렇게나 새로울 수 있다니 부럽구나, 루모.
나는 소리와 공기를 차단하고 싶었던 자폐의 공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에 잘 정착한 걸까? 그 시절, 나를 쓰다듬어 주는 다정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더 거침없는 마음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라서 서럽고 외로운 존재들의 연결, 쓰다듬과 어루만짐. 그건 시간과 정소를 넘나들고, 인간과 비인간을 뛰어넘어, 존재 모두에게 필요충분조건으로 자리함을 나는 오늘 배웠다. 루모와의 접촉, 혹은 접속이 반갑고도 고마워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나 마음이 들썩거렸나 보다.
너를 쓰다듬으며, 20대의 어느 날, 어둑한 공간에 웅크려있던 나를 어루만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