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칼리 <인생은 지금> &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의 저녁 식탁에는 늘상 막걸리 두세 병이 함께 한다. 그날의 뉴스와 일상을 공유하며 마시는 막걸리는 하루의 소화제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는 만족감이 곡주가 주는 포만감과 함께 밀려온다.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일어서면 그때부터 고민 시작.
아직은 둘 다 일을 하는지라 (오늘로 남편의 퇴직이 310 일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하루는 아침 6시부터 시작이다. 종일을 자리에 편히 앉아볼 겨를 없이 일한 데다 막걸리까지 걸쳤으니 응당 그다음 순서는 눕기인데, 설거지가 걸린다. 휴~ 당장 앞에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고, 내일 아침의 산뜻함을 맛볼 것인가, 여기 와서 쉬라고 나를 부르는 소파에 지친 육신을 묻고, 내일로 미룰 것인가?
오늘은 토요일. 에너지가 조금 남아 있다. 그래, 오늘은 하고 잔다.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다 나는 갑자기 도를 깨친 사람처럼 읊조린다. “인생은 쌓인 설거지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인생은 지금>은 나이 든, 한 부부의 이야기다.
이제 막 은퇴를 한 남자는 신이 났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 싱글벙글이다. 젊은 날 그를 짓누르던 사회적 책무는 이제 끝이다. 드디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며 아내에게 여행을, 외국어나 악기 배우기를, 밤낚시를 함께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아내는 부엌일과 청소를 마저 해야 한다고 답한다. 달가운 표정이 아니다. 남편의 제안을 내일로 미룬다. 류머티즘과 아픈 허리 탓을 하며 내 인생은 지금 여기 있는데 어디로, 왜 가야 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쌓인 설거지가 아니야.
지금도 흘러가고 있잖아. 가자!
뭐라고? 인생은 쌓인 설거지가 아니라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앞에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듯 살아온 내 젊은 날들이 그 말에 아프다.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몸을 씻고, 단장하고 출근하면 끝이다. 당신의 24시간은 오롯이 당신으로 채워진다. 차곡차곡 경력이 쌓이고,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었지. 그렇게 당신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길을 걸어갈 때 나는 어땠을까?
무한반복 되는 집안일에 두 딸아이의 육아. 아이 둘을 임신하고 키운 기간, 다 합쳐야 3년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나도 계속 직장을 다녔어. 씻겨지지 않은 피로를 밀어내며 아이를 씻기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며 청소기를 밀었지. 그 순간순간마다 좌절은 나만의 것이었어.
분노의 시간도 있었고, 외로움에 눈물 흘린 적도 많았지. 이별을 꿈꾼 적도 물론 있었고. 그럼에도 이 순간 나이 들어 우리가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믿음이었고, 의리였어. 그 많은 사람들 중 서로를 알아채고, 같이 걸어 나가기로 한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가 지금껏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었던 거야. 한 마디로 내 덕분이라는 거지, 이 사람아.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가다
가끔 같이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
나는 당신과의 30여 년을 이렇게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각자의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저녁에 마주 앉아 반주와 이야기로 하루를 마감하는 삶. 서로가 아직도 곁에 있고, 증오보다는 사랑 쪽으로 더 기우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잠이 드는 삶.
그러니 영감님~ 같이 놀아줄 거라는 기대는 접어두세요. 따로따로 행복하게, 알았지? 당신뿐 아니라 내 인생도 지금부터거든. 참! 퇴직하면 시간도 많을 테니 자기 설거지는 자기가 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