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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13. 2024

입양소설. 너에게 가 닿기까지.

1부.   1장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왔다. 마흔일곱 살. 아직 갱년기가 시작되었다는 다른 징후는 없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절은 무섭게 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선유는 결혼 십 사 주년을 얼마 전에 맞았다. 선유와 호진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선유는 결혼을 못 하고 평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아이가 없이 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결혼에 따라오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선유는 늘 출산을 두려워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를 낳는 것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고통인지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그녀는 공포로 움츠러들었다. 언젠가 다가올 아이를 낳는 그 순간이 마치 죽음의 순간같이 느껴졌다.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다.

  선유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녀에게 있는 유전적 소인을 물려준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나중에 아이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 유독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분명 자신을 탓할 것 같았다.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그것이 아버지가 물려준 유전적인 영향 때문인 것만 같아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것이 저주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아이가 커서 그녀에 대해 그렇게 느낀다면 선유는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에는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소망 같은 게 생겼다. 호진은 선유와는 다르게 평탄한 환경에서 행복한 유년기와 청소년기, 고뇌 없는 청년기를 거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고 몇 년 전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선유와 달리 호진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살아계셨다. 14년을 살아오면서 호진이 크게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선유는 그것이 다 그의 건강한 성격 덕분이라 여겼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이고 남 눈치 안 보고 사람들과 끈끈하게 엮이지 않아도 나름 혼자서 행복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그런 호진의 성격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훨씬 수월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런 성격을 닮은 아이라면 아무리 세상이 험난해도 잘 헤쳐가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반의 확률이 있었지만, 호진에게 기대를 걸고 선유는 당연히 엄마가 될 날이 오리라고 막연히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자연적으로 임신할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꼬인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결혼 초기에는 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피했다. 귀국 후에는 돌연 우울증이 찾아와 몇 년간 아이 가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선유가 임신을 포기한 것은 그때였다. 우울증이 시작된 초기에는 길을 가다가 배가 불룩한 여자를 보기만 해도 슬퍼져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곤 했다. 이러다가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주 펑펑 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출산에 대한 공포가 상기되면서 어쩌면 그녀 속에 잠재된 공포가 작동해 임신할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든 건 아닐까. 나름 분석도 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생각은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 생각은 상실감과 허전함, 슬픔보다는 오히려 해방감, 안도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이가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녀를 슬프게 했다. 아이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입양을 하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들기 시작한 그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갔다.

“여보, 나 병 다 나으면 나중에 입양하고 싶어”.

“입양? 글쎄...난 아이 없어도 괜찮은데. 당신이랑 둘이 사는 것도 좋은데”.

호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호진은 아이를 좋아하는 선유와는 달랐다. 아이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선유는 호진이 어느 아이에게도 눈길을 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당신 마음이 준비되면 그때 해요. 나도 지금은 자신이 없어. 나 하나도 너무 버거운데...이 병이 언제 나을지도 모르고...”

  우울증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터널 그 안에 갇혀서 다시는 빛이라는 것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과연 앞으로 가고 있기나 한 건지, 시간은 흐르는데 그녀는 여전히 제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가다 보면 끝이 나오련만 걷고 있는 건지, 그냥 한자리에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입양 생각도 엷어지고 이대로 아이 없이 지내나보다 싶었다.

  결국은 믿어지지 않았던 끝이 찾아왔다. 30대 후반에 시작되었던 우울증이 끝났을 때 선유는 마흔 살을 넘어서 있었다. “아직은 희망이 있지”. 주위에서는 그렇게 말들을 했다. 호진의 부모도 아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아이 갖는 것을 깨끗이 포기한 상태였다. 단 한 번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지 않았다. 병원에서 딱히 난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해서 임신이 어려운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도 선유의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우울증 초기에 이미 충분히 울었고 임신 가능성의 상실에 대해 슬퍼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에 대해서 선유와 호진은 부정적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굳이 갖고 싶지 않았고 선유의 몸 상태를 염려했다. 선유는 굳이 그 힘들다는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출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해방감을 잃고 싶지 않았고 몸 고생, 마음고생을 경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시 입양을 꿈꾸기 시작했다. 입양할 수 있는데 이미 포기한 출산을 다시 고려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선유는 몸을 너무 아껴서 출산 대신 입양을 선택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종류의 고통, 특히 육체적 고통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출산이나 시험관 시술은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으로 생각됐다. 당연히 그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입양을 결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편한 길을 찾아 입양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는 양심에 찔려서 포기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자연 임신도 되지 않았고 다른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입양을 결정하기에는 몇 가지 방해 거리가 있었다. 호진의 마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호진은 그냥 둘이 여행 다니며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선유와 호진은 몇 년에 한 번 유럽으로, 미국으로 한 달씩 자유여행을 다니며 다른 부부들과는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을 영위했다. 집에서는 늘 호진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대학 강사인 선유는 강의를 준비하고 논문을 쓰고 번역했다. 선유는 살고 있는 도시에서 러시아어권 다문화 가정들을 돕고 전도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일에 몰두하느라 아이가 없어 허전하다는 느낌도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없어서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중요한 이유는 호진의 부모님이었다. 아직도 선유에게 아이가 생기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는 두 분께 입양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호진이 원한다면 가능했겠지만, 선유 혼자 뻔히 예상되는 시부모의 반대를 뚫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좀 더 기다리면 두 분도 포기하실 날이 오겠지...그렇게 한 해 한 해를 흘려보냈다. 선유의 말을 잘 따르는 호진을 설득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다가 마흔일곱이 되는 해 봄,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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