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가 만들어준 길을 걸으면 길 끝에 자신은 없다.
성현은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들과 함께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각자 취업, 연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진로에 대한 고민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요즘 나 진짜 회사 그만두고 싶은데… 내가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어."
한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업무가 지겹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나도 그래. 일도 힘들고, 뭘 하든 회사에선 인정받기 어려운 것 같아." 또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맨날 야근하고 쉴 틈도 없으니까 에너지도 다 떨어지고… 진짜 내 길이 뭔지 모르겠어."
친구들의 말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공감했습니다. “나도 요즘 비슷해. 지금 하는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인지 잘 모르겠어.”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한 친구가 성현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근데 성현, 넌 늘 회사에서도 잘 적응하고, 불만도 별로 없잖아? 너도 그런 고민해?”
성현은 그 말에 살짝 당황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불평 없이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친구들의 고민을 듣다 보니 자신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힘듦과 불확실함이 마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자신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뿐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성현은 문득 자신이 정말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친구들의 말을 듣고 따라 말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며칠 후, 성현은 출근길에 이 생각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회사에서 느끼는 이 막연한 답답함이 정말 내 고민일까, 내가 진짜 답답함을 느끼기는 하나? 아니면 그냥 모두가 겪는 것이라 자연스레 내 것처럼 여긴 걸까?”
If you can see your path laid out in front of you step by step, you know it’s not your path. Your own path you make with every step you take. That’s why it’s your path.
- Joseph Cambell -
다른 이가 만들어준 길을 걸으면 길 끝에 자신은 없다. 오직 너의 길에서만 너를 만날 수 있다.
성현은 언제 어디서든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동료들과의 회식에서도, 가족 모임에서도 그는 언제나 분위기를 파악하고 적절한 리액션을 주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편안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는 성현은 늘 사람들 사이에서 조화롭게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마음 한구석에 “이 고민이 정말 내가 가진 고민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회적 동일시(Social Identity Theory)라고도 하며, 상현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특히 쉽게 겪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헨리 타지펠(Henri Tajfel)과 존 터너(John Turner)는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집단에서 요구하는 행동에 맞추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처럼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징과 가치를 스스로의 자아 개념이 섞이면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성현은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쉽게 공감해주다 보니 때로는 친구들이 말하는 고민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고민을 쉽게 자신의 고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성현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한국 사회에서는 '눈치껏 행동한다'라는 말이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집니다.
"중학교 2학년 정도면 이 정도 문제는 풀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그러니?"
같은 말에서 우리는 집단의 평균이나 주변의 흐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을 익히게 됩니다. 쉽게 말해,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될수록 오히려 진짜 ‘나’는 누구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현실이고, 타인의 시선과 기대를 어느 정도 고려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많은 자기 개발서가 “너 자신만의 길을 가라”라고 들이밀듯 조언하지만, 그 길이 무작정 사회적 기대를 무시하는 방향이라면 자칫 현실에서 소외되거나 부적응자가 되어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싶은지 스스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선을 명확히 할수록 우리는 필요할 때 관계와 눈치를 활용해 사회적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인 자아도 지킬 수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그만큼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흐름에 민감하게 신경 쓰며 살아갈 수 있고, 반대로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눈치에 덜 얽매이고 자신의 주관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려나가고 싶은 모습에 맞게 눈치와 독립성의 균형을 조절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균형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죠.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미국의 신화학자, 작가, 교수로, 신화와 인간 경험의 관계를 연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특히 전 세계의 다양한 신화 속 공통된 구조와 상징을 분석하여, 인간의 내면적 여정을 탐구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이론인 "영웅의 여정(The Hero's Journey)"은 신화적 서사의 공통 패턴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한 개인이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캠벨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은 전 세계 신화와 전설에서 발견되는 영웅의 여정을 정리한 책으로, 영화,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문구 "Follow your bliss"는 자신의 내면적 열망을 따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메시지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Tajfel, H., & Turner, J. C. (1979). An integrative theory of intergroup conflict. In W. G. Austin & S. Worchel (Eds.), The social psychology of intergroup relations (pp. 33-47). Monterey, CA: Brooks/C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