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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여성의 사연

감정 노동은 공짜가 아니다

by 황준선

30대 초반 여자입니다. 지금 남자친구와는 1년 정도 정도 만났고, 그동안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 남자친구에게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같은 아픔을 또 겪게 되진 않을까 늘 마음 한켠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어요.


전 남자친구는 제 외적인 부분을 계속 바꾸려고 했고, 그런 지적들이 큰 상처로 남았어요. 그때는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제 자신을 깎아내리며 맞추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는 저를 떠났고, 그 이후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제 자신을 미워하게 됐었죠.


하지만 지금의 남자친구는 제 있는 그대로를 예뻐해 주고, 그런 모습 덕분에 저도 저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자존감도 많이 회복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내외적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상형이에요.


문제는,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도 자꾸 "혹시 이 사람도 언젠가는 나를 떠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나 예쁘지?”, “오빠 나 사랑하지?”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되고, 미래에 대해 "그때도 옆에 있어줄 거야?"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해요.


남자친구는 그런 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맞춰주지만, 저는 그게 더 미안하고 걱정돼요. 이렇게 계속 상처받았던 기억에 얽매여서 지금의 관계에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건 아닌지, 또 제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진지하게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하나 고민될 때도 있어요.


서로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니까, 제 이런 모습이 남자친구를 질리게 하지 않을까 많이 걱정됩니다.

tempImageceQq6I.heic 출처: unsplash

심리학자의 답변

자신의 모습이 부담스럽고, 남자친구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계시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인식하고 계시니 최악의 상태는 아니에요.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거고, 작성자님이 그런 스타일인 것뿐이에요.

자책할 일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키우라'라고 말할 텐데요.

자존감이 키우자 하면 키워지고, 낮추자 하면 낮아지는 것도 아니니,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은 이겁니다.

내가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5만 원씩 남자친구에게 주세요.


남자친구가 당연히 안 받겠다고 할 텐데,

그럴 때 계좌이체를 해버리든 카카오페이를 하든 하세요.

절대 거절한다면, 차라리 5만 원씩 기부 단체에 기부하세요.


만약 그 사랑의 확인이

한 번에 5만 원을 낼 만큼 나에게 간절하고 꼭 필요한 거라면

5만 원씩 내고 하시겠죠.

5만 원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그 집착도 사라질 겁니다.

tempImage1QSkD5.heic 출처: unsplash

작성자님께서 자꾸 집착하는 건, 그게 공짜라서 그래요.

전 남자친구가 외모 지적을 하던 것도 공짜라서 했겠죠.

만약 외모 어디를 고쳐라, 머리 스타일을 이렇게 바꾸라고 할 때마다

5만 원씩 작성자님에게 줬다면 기분 좋았을걸요?


제가 농담같이 들리게 말했지만, 핵심은 이겁니다.

남자친구 입장에서 그 확인 작업에 대응하는 건 상당한 수고스러움이 드는 일입니다.

요즘 편의점 최저시급이 1만 원이 넘는데,

그런 엄청난 감정 노동에는 시간당 최소 5만 원 이상은 할 겁니다.


만약 그 확인 작업을 하고 싶을 때마다 입으로 편안~하게 떠들면

사실 작성자님은 그때마다 남자친구한테 5만 원씩 뜯어먹고 있는 셈인 거죠.


지금 남자친구가 이상형에 가깝고, 믿음도 신뢰도 주는 좋은 사람이라면

그런 착한 마음을 이용해서 돈 뜯어내지 마세요 ㅎㅎㅎㅎ


그리고 고민의 핵심은

작성자님이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그 방향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런 건데요.

지금은 그거까지 말할 단계는 아니니까, 일단 여기까지만 쓸게요.


5만 원 주기 전략으로 급한 불을 껐으면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

tempImage66PXFB.heic 출처: unsplash

왜 이런 상담을 했을까?

명절에 어른들이 하는 잔소리 진짜 듣기 싫죠? 그런데 일장 연설을 한 이후에, 10 만 원 20만 원을 용돈으로 주면, 그 잔소리는 마법처럼 진심 어린 조언으로 바뀝니다. 다들 경험해 보신 적 있죠? 비슷한 거예요.


이 상담에서 상담자가 선택한 접근은 '자존감 회복'이나 '트라우마 치유' 같은 추상적 조언 대신, '공짜의 대가'라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프레임으로 문제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성향에 대한 중립적 수용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거고, 작성자님이 그런 스타일인 것뿐이에요. 자책할 일 아닙니다". 상담자는 자신의 이 행동이 '틀린 것'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에 더더욱 고치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어요. 자책만 하면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옳고 그름의 프레임을 없애는 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5만 원 전략의 제시

"작성자님께서 자꾸 집착하는 건, 그게 공짜라서 그래요". 동의하시나요?

불안 애착이나 트라우마가 아니라 '비용이 없는 행동'으로 본 거죠. 우리는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5만 원을 제시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금방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답니다.


전 남자친구 행동의 재해석

"전 남자친구가 외모 지적을 하던 것도 공짜라서 했겠죠. 만약 외모 어디를 고쳐라, 머리 스타일을 이렇게 바꾸라고 할 때마다 5만 원씩 작성자님에게 줬다면 기분 좋았을걸요?". 전 남자친구가 나한테 상처를 줬던 일을 사실 내가 현 남자친구에게 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이 상담 방식이 효과적인 이유

우리는 '자존감'을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곳에 갖다 붙이곤 합니다. 무슨 말만 하면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퉁치는 거죠. 이 사연도 사실 그렇게 바라봐도 돼요. 그렇지만, 사연자도 그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게 이슈죠. 그래서 이유가 확 와닿을 수 있게 자신의 불안 애착을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로 재구성했습니다. 5만 원이라는 구체적 금액을 제시함으로써 추상적인 '부담'을 실감할 수 있게 하고, '자존감을 키워라' 같은 추상적 조언 대신, '5만 원을 내라'는 구체적 행동 지침을 준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응급처치일 뿐 근본 치료는 정체성 확립이라는 것까지 암시했지만, 어차피 지금 사연자에겐 들리지 않을 외침일 테니 거기서 딱 멈추는 판단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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