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운동장에 도착하자 목 줄을 풀어 주는 배려로 나는 온 세상이 나의 것 인양 신나고 즐겁게 온몸과 꼬리를 흔들고 풀에서 풍겨 나는 냄새도 맡으며 뛰어놀았다.
나와 달리 주인아저씨는 공원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아 뛰어노는 나를 바라본다. 행여 내가 그의 시아에서 벗어 날려면 나의 이름을 불러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주인의 의도에 따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공간 안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새를 쫓기도 한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의 온몸에 묻힌 흙과 더러운 오물 냄새 때문에 주인아저씨 손에 강제로 이끌려 목덜미를 붙들리고 찬물과 더운물을 혼합하여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하며 물을 뿌린 후 비누 칠을 한다. 이제는 나도 목욕이 익숙해졌다. 익숙하기보다 포기 상태이다. 목욕은 정말 싫지만 (목욕을) 거부하면 나에게 어떠한 체벌과 잔소리를 늘어놓을지 지난 몇 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
목욕이 끝날 때까지.
목욕이 끝나면 뜨거운 바람을 견디며 털이 가벼워질 깨까지 기다려야 한다. 털이 마르고 가벼워지고 주인아저씨는 나의 몸에 가분할 정도의 많은 양의 향수를 퍼 붙는다. 그러고 나면, 나는 주인아저씨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
'왜 목욕을 해야 하는지?'
나를 목욕시켜주지 마라고 데모라도 한다면 나는 주인아저씨의 반응을 알고 있다.
"너 이제부터 밖에서 살아. 집안에 들어오지 마"
'참는 강아지에게 복이 있나니'
내 소개가 늦었다. 나는 시츄와 푸들 사이에 태어난 시푸이다. 주인아저씨는 나의 이름을 쫑이라고 지어 주었다. 어느 날 나의 불편하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근원을 주인아저씨와 그의 딸이 산책 중에 대화를 엿듣고 알게 되었다.
"아빠 왜 쫑이라고 이름을 지웠어?" 언니의 질문에 주인아저씨 대답이 나를 놀라게 했다.
"어릴 때 기르던 개 이름이야. 그 개는 수컷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는 암컷인데 수컷 개 이름을 나에게 주인이 아무런 고심 없이 지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쫑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개명해 달라고 생떼라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한 동안 마음의 상처가 커 몰래 가출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주인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산책을 나가면 나의 뜻에 따라 행동을 할 수 없다. 나의 목에 채워진 목줄은 주인아저씨의 편리에 따라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산책을 해야 한다. 걷다 보면 옆집 개들이 나의 모습을 먼 길에서부터 냄새를 맡고 왕왕 으르렁 거리며 나를 반기기도 하고 경계를 한다.
'어쭈 눈 안 깔아' 어쩌다 덩치가 큰 개 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애써 눈 맞춤을 피하려고 주인아저씨 옆에서 행여 생길 좋지 않은 일을 대비하며 걷는다. 물론 더러는 나 보다 덩치가 작은 개를 만나면 나는 그들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수컷의 흔적을 맡으려고 코를 나무 귀퉁이에 드밀거나 용변이라도 보려면 주인아저씨는 성급하게 "뭐 하냐, 빨리 가자" 하며 목줄을 당긴다. 누구를 위한 산책인지 하소연 같은 낑 혹은 깽깽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기도 한다.
"왕왕" 오늘도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소파에 의지 하며 창가에 앉아 있는데,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이 집으로 접근하자 나는 그를 향해 짖어 되었다. 목청을 높여 짖어대고 있는 나의 이름을 주인아저씨가 부른다. 나는 주인아저씨의 목소리 높낮이에 따라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쫑! 쫑!"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밤 12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자택 지하에서 주인아저씨는 일을 한다. 일을 끝낸 아침 시간에 지하실 소파에 누어 잠을 자는 날이 많다. 나 역시 주인의 잠자리에 뛰어들어 그의 발끝자락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잠을 들기도 한다. 지금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한 목소리톤이 아니다. 자신의 잠을 깨운다는 불평을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다,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인가? 짖음 질 하지 말까?'
집안의 안전을 위해 짖어대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무정하고 매몰차게 짖어대지 말라고 내 이름을 목청을 높여 불러대고 있는 주인에게 나의 충심을 몰라주는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