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수 Oct 11. 2019

자녀의 세대 이론 : <명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명이 명확하지 않으면 지금 자녀 세대는 실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녀는 <명확>한 걸 좋아한다. 반대로 <명확> 하지 않으면 자녀는 이내 <실망>한다. <실망>은 곧 불신으로 이어지고 이후 자녀와의 관계에서 <공감>을 얻는 건 좀 힘들어진다고 봐야 한다.


<명확성>이 단지 부모에게 한정되는 건 아니다. 학교에서 자녀가 선생님의 설명이 <명확> 하지 않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의문>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녀는 선생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라고 했을 때 선생님은 스마트폰을 맡겨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학생은 쉽게 <동의> 하지 않는다. 이내 <불만>을 가진다. 그리고 교칙이 그렇다고 하니 스마트폰이야 내겠지만 이내 매끄럽지 못한 감정은 고스란히 자녀들의 영역인 인터넷으로 향한다. 그리고 원하는 게시판을 골라 쏟아낸다. 인터넷이 아니면 <단톡방>이나 그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명확함>을 찾는다. 그러면 개운하지 않았던 기분은 익명의 댓글러를 통해 풀린다. 자신의 <의문>이 타당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통쾌함까지 느낀다.


어떻게 해서 자녀는 <명확>한 걸 좋아하게 됐을까? 그것은 <인터넷>의 역할이 크다. 그리고 그 도우미로는 일단 부모의 역할도 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일단 우리 부모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현상도 한몫을 해서 자녀가 물어보면 아는 지식으로 명확하게 답을 해줬다. 또 자녀가 초등학교 때부터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모들은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로 <위키피디어>나 <나무위키> 그도 아니면 <네이버 지식검색> 사이트에서 재빨리 찾아서 알려줄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인터넷에서 찾아보라고 어릴 때부터 찾는 <방법>과 <태도>를 가르쳐주곤 했었다. 즉,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모르는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명확>한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자녀의 검색 능력은 월등해졌고, 궁금한 건 즉시 해소가 되지 않으면 답답해한다. 이러한 답답함이 잦아지거나 또는 길어지면 결국 <게으른 자녀>로 변해가는 영향까지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명확성>은 자녀가 성장할수록 생활에서도 연관 지어 해답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부모가 하는 말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현상을 만든 것이다. 부모는 한계가 있으니 별걸 다 묻고 따진다고 하지만 자녀에게는 꽤 합리적인 질문인 것이다. <스마트폰>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구체적이지 않은 <명령문>은 자녀를 <명확>하게 설득을 시키지 못한다. <명확>한 설명이 되려면 <왜> 스마트폰을, <왜> 게임을 하면 안 되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긍하고 조절한다.


부모의 <지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제안하는 것에 무조건 <된다> 또는 <안된다> 하는 식의 섣부른 <사실 판단>은 자녀를 짜증 나게 하거나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왜> 하면 안 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충분히 공부한 후 <가치판단>을 설명해줘야 자녀는 부모의 <지도>에 순응한다. 이러한 설명 없이 무조건 따진다고 오히려 몰아세우면 자녀는 부모 앞에서는 순응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점점 부모를 신뢰하지 않는 위험한 상황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확성>은 자녀가 생각하는 <평등>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예로 들자면 자녀가 스마트폰을 오래 한다고 해서 밤 9시 이후로는 스마트폰을 하지 말라고 지도하면 자녀는 일단 부모의 말에 조금 대들 가다도 이내 수긍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놓고 정작 부모가 9시 이후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이를 <평등>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등> 하지 못하다는 건 자녀에게 <명확> 하지 않은 것이다. 쉽게 말해 자녀에게 <명확함>이란 동등한 조건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혹시라도 부모가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야 한다면, 자녀 몰래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통화음을 낮춘 다음에 이불을 덮어쓰고 통화를 해야 한다.(다소 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 만약 그 자체가 성가시고 힘들다면 결국 부모가 왜 9시 이후에 스마트폰을 해야 하는지를 자녀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사용해야 한다. 맞다. 부모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금이 잘못된 것인지 예전이 잘못된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자녀를 <지도>한다라는 건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그만큼 부모도 <동참>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가져야만 가능한 시대인 것이다.


그럼, <학교>는 다를까?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을 걷어놓고 정작 선생님이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면 자녀는 이를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어딨어요?라고 반문한다면 자녀에게 직접 물어보면 답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경찰>은 다를까? 아니다. 같은 입장이다. 욕설을 하는 학생에게 지도한답시고 욕설하면 안 되지?라고 말을 했다간 곧장 왜 하면 안 되냐고 되돌아온다. 욕설이 듣는 사람에게 감정을 해칠 수 있고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률적으로 따지면 피해를 유발하는 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욕설을 해서는 안된다고 설명해주는 것이 <명확> 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이 하는 말은 무조건 들어아한다는 논리는 자녀에게 <궤변>인 셈이다.


<명확성>은 <정의>와도 관련이 깊다. 그래서 지금의 자녀들은 <차별>과 <편견>에 민감하다. 이유 없이 <차별>하고 이유 없이 <편견>을 받는 건 불공정한 처사이자 지극히 <명확> 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차별>과 <편견>을 받았을 때 화를 참지 못한다. 설령 잘 참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이는 자녀가 부모 몰래 속으로 축적하고 있는 것이며 이 축적이 용량을 초과하면 <이탈행위>로 번지게 된다.


그러니 해답을 보자.

자녀에게 <설명>은 그 태도 자체가 <진지> 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 자녀가 나중에 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녀에게 <명확한 설명>과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그냥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자녀 보고 사회에 나가서 불편하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냥 참고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밖에 들릴 수 없다.


자녀의 <일탈행위> 시점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부모가 <명확> 하지 못한 것도 자녀에게는 충분히 <일탈>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자녀의 세대이론 : 충분한 문자 <이모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