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류장의 흔적> 2화
이곳에는 국내에 몇 안 되는 레이싱 카트 트랙이 있다. 그가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카트 트랙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생겼다. 당시 마을의 남자아이들 중 그곳에 가보지 않은 아이가 없을 정도로 카트 트랙은 큰 인기를 끌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몇 번의 경주 후 싫증을 느꼈지만 소수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소수의 아이들 쪽이었다. 그의 어린 삶은 레이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카트 레이싱에는 엄청난 돈이 든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불우한, 가난한 가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마을에서 손에 꼽히는 부잣집이었다. 돈을 핑계로 댈 수 없다는 것이 묘하게 미래의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레이싱을 꽤 잘했다. 꽤. 딱 그 정도로 잘했다. 이곳의 카트 트랙에서 레이싱 스쿨을 수료한, 말하자면 어느 정도 진지하게 레이싱을 대한 아이들은 당시 열다섯 명 정도 됐었다. 그는 그중에서 2,3등을 오고 갔다. 1등을 차지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진지함의 면에서는 그가 단연 1등이었다. 그는 레이싱을 대할 때만큼은 아이가 아니었다. 가능한 모든 정보들을 끌어모았다. 좋다는 것은 전부 다 했고,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 멀리 했다. 그의 몸은 점점 레이싱 카트에 특화되어 갔고, 정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환상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그는 카레이서를 꿈꾸는 아이로 불리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면 레이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러한 대우가 싫지 않았다.
항상 그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하던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도시로 떠나 레이싱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15명의 아이들 중 10명이 고등학생이 되기 이전에 레이싱을 그만두었다. 다시 또 그보다 어린아이들이 이곳에 뛰어들었지만 그 수는 예전 같지 않았다. 사람이 줄어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항상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 썼다. 그는 언제나 1등을 했다. 이 마을에서는. 그는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꿈꾸는 f1레이서가 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마을을 벗어나야 했다. 한국은 카레이싱의 불모지다. 한국에서 f1레이서가 된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국에서 독보적인 레이서가 돼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무대에서 부딪히는 것을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이 전국 단위의 레벨에서는 경쟁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자신보고 레이싱을 가장 잘한다고 이야기해주는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그의 나이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자 동시에 가장 큰 축복인 소식이 찾아왔다. 코치는 계속해서 그가 전국 단위의 레이싱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말해왔었다. 그것을 거절하기 위한 핑계를 그는 어떻게든 만들어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점이었다. 그가 끝끝내 억지로 대회 참가를 접수했을 때, 국내에서 개최되던 f1 그랑프리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터스포츠 종목의 정점에 있는 대회가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지 않는다는 뉴스는 한국의 모터스포츠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줄줄이 일자리를 잃었고, 그의 코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최 예정이었던 레이싱 대회들은 연달아 취소되었고, 그가 참가하기로 한 대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치는 두 소식을 담담하게 그에게 말해주었고, 그에게도 이쯤에서 레이싱을 그만두는 것이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깊은 내면에서는 다행이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 스스로도 그 말을 깨닫지는 못했다. 어쩌면 알면서 외면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 말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리고 그가 마주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부정당했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그는 자신의 환상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 있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그의 환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의 노력들이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혼자만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의 말도 안 되는 환상을 기억했고, 그 혼자서 믿음을 갖고 행했던 우스운 노력들을 기억할 것이었다. 그는 환상의 흔적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레이싱뿐이었고, 평생을 살아온 마을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그것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버스가 차고지에 도착했다. 기사 선배가 시내버스 운전석에 빈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말해준다. 그는 아직 자신의 순서가 아니라고 사양하지만 이곳에 시내버스로의 이동을 원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배가 일깨워준다. 그는 생각을 해보겠다 말하고 선배는 그것의 기한을 3개월로 정해준다. 그는 왜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가 희망하는 고속버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내버스로의 이동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은가.
그날 밤, 그는 언제나처럼 한밤중의 정류장으로 향한다. 오늘 그녀가 그린 것은 사과다. 그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안 하던 행동을 한다. 사과의 오른쪽 위에 그것을 파먹은 듯한 흔적을 그려 넣는다. 그 위쪽으로는 나무와 잎까지 그린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겨우 보이던 그녀의 그림이 이제는 꽤나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고 싶은 것일까, 그녀의 의미 없는 행동에 동참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그녀가 이렇게 추가된 요소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살짝 걱정된다. 하지만 그녀가 이 정류장에 돌아오기까지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문득 그는 오늘 오후 한 어린아이가 정류장에 낙서를 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는 그 정류장의 위치를 더듬어 생각해 내고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 원래 있던 그녀의 그림은 쥐였다. 그런데 그 옆에 치즈가 새로 그려져 있다. 쥐의 세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치즈다. 오늘 오후 그녀는 분명히 그 모습을 보았고, 미소 지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른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내일의 정류장. 이곳에는 두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투박한 강아지 그림. 너무나 전형적인 강아지 그림이다. 종은 푸들인 것 같다. 강아지의 입은 웃고 있다. 그 옆에는 목도리 그림이 있다. 그녀가 한국의 뱅크시가 되기에는 틀려 먹었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 메시지로 보나 그림의 실력으로 보나. 그는 두 그림 사이를 보면서 어떤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할까 고민한다. 그도 예술가의 재능은 없다. 온갖 것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즉흥적으로 떠올린 눈사람을 그린다.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긴 눈사람 그림이 탄생한다. 그럼에도 그는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이 그림을 볼 그녀의 표정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