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정류장, 마을의 정류장

소설 <정류장의 흔적> 4화

by 물이

점점 정류장에 그려진 그림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정류장의 그림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는 하루에 최소 다섯 번씩은 본다. 그는 매일밤 정류장에 그림을 그렸고, 이제 그의 그림 개수와 그녀의 그림 개수가 비슷해질 정도에 이르렀다. 정류장의 그림들이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그것에 동참하는 사람들 또한 늘어났다. 마을의 몇 안 되는 아이들이 특히 그러했다. 초등학교 앞의 정류장, 들판 앞의 정류장은 어느새 다양한 그림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곳의 정류장들은 놀이터가 되었고, 숲이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의 그림들은 점점 존재감을 잃어갔다.

그는 처음에 그것을 걱정했지만 매일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걱정을 털어낸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밝음을 더했고, 그녀의 일상에 변함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매일 두 번째 24번 버스를 타서 그날의 정류장에 가고, 네 번째 버스에 다시 올라 종점으로 향한다. 하루에 단 한 정류장만 전진하고, 그곳에 자그마한 그림을 그려 넣는다. 단 한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그날의 세 번째 버스를 운행하고 있을 때 알 수 있다. 그 시간에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처럼 멍하니 정류장에 앉아 있지 않다. 대신 그녀는 주변의 정류장들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그림들을 구경한다. 그럴 때 그녀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세 번째 운행을 그는 가장 좋아한다. 그녀는 더 이상 하루에 한 정류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여전히 하루에 단 한 정류장이고, 그것만큼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


물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정류장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류장에 그림을 그리는 모두가 아름다운(최소한 아름다운 의도를 갖고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어떤 정류장에는 매우 음란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마을의 노인들은 그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그들은 매일같이 정류장의 그림들을 지우라는 민원을 넣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시골 마을에서 그러한 민원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는 그런 민원을 대신해서 처리한다. 부분적으로. 그는 그의 그림 개수가 그녀의 그림 개수와 똑같아진 이후 그림을 더 그리는 것을 멈췄다. 그녀 그림의 존재감이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을 그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밤 정류장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싫어할 것 같은 음란한 그림들을 지운다. 말하자면 그는 정류장의 품격을 매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러한 한밤중의 정류장 작업이 어려워진다. 더 이상 한밤중의 정류장은 존재 이유가 없는, 보이지 않는 곳이 아니다. 정류장에 그려진 그림들이 정류장의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한밤중의 정류장을 본다. 그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버스의 승차를 기다린다는 본래의 목적을 잃었음에도, 그 존재감을 다른 방식으로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류장에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거기서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익명의 정류장 지킴이로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의 작업을 알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의 부끄러움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날에는 그녀가 직접 망가진 정류장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가 그러한 불순한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그는 표정으로 알 수 있다. 그런 그림은 아무리 작게 그려졌어도(대체로 크게 그려져 있긴 했지만) 다른 모든 그림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존재감을 갖는다. 사람들은 오직 그 그림만 보고, 나머지의 다른 그림들은 전혀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들이 사람들의 눈에 보일수록, 그녀가 들고 다니는 큰 원통형의 화구통 또한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둘을 연결한다. 그녀의 목적에 대한 의문 하나가 해결되자 사람들은 조금 더 용기를 갖는다. 지난번 할머니에게 되물었던 물음 때문인지 여전히 직접 그녀에게 말을 걸진 못 하지만, 그녀가 앞에 있음에도 그녀에 대해서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있게 되었다.

정류장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 하나하나가 그녀와 연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의 아이들이 정류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접 보았음에도, 그녀만 그림과 연결했다. 그리고 그 연결을 그녀를 비난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에 대한 무지가 주던 약간의 공포가 이제는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무시로 바뀌었다. 그간 느꼈던 공포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마을 사람들은 매 순간 자신들이 그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다른 지역, 도시 사람들에게 무시받던 자신들의 직업이 그 여자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최소한 그들은 무언가 하는 일이라도 있으니까. 그에 반해 그녀는 그들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몸을 가졌음에도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하루 종일 버스만 타고, 정류장에 낙서를 하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역으로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정류장에 그려진 그림들을 지우라는 민원을 멈추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녀가 하는 유일한 일을 지키고 싶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 일이 그들과 그녀를 가르는 지점이었으니까. 그것이 없어진다면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를 비난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계속해서 그 일을 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서 수군거릴 때,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이 볼 때 그러한 그녀의 연기는 자신들의 성에 차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미묘한 틈이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이 스스로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한심하다고 보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신경 쓰는 것이었다. ‘그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는 ‘행동’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그녀가 보기에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이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책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하루를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커다란 원통형의 화구통을 가지고 버스를 탄다. 그녀를 둘러싼 말들을 최선을 다해 모른 척하고, 하루에 한 정류장씩 흔적을 남긴다. 어떨 때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지만 요즘은 대체로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그녀는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지금도 세 번째 운행을 할 때 그녀는 주변의 정류장들로 그림을 구경하러 간다. 누군가의 새로운 그림이 추가되어 있을 때 그녀는 여전히 행복한 표정을 보인다. 익명의 그림을 통해 그녀는 환상의 빈틈을 메운다. 어찌 되었든 정류장에 그림은 계속해서 늘어가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지켜주고자 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마을 사람들 중 그것을 없애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그림들을 그는 스스로 지키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도 다른 마을 사람들과 같이 그녀가 그러한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최대한 조심해서 하려 하고,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해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목요일 연재
이전 03화정류장의 그림